전두환, 노태우가 만든 하나회는 어떤 조직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63년 전두환, 정호용, 노태우, 김복동 등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생들의 주도로 비밀리에 결성한 군대 내의 사조직입니다. 처음에는 1951년 육군사관학교(첫 4년제) 입학생 중 영남 출신 전두환, 노태우, 박병하, 김복동, 최성태의 '5성회'에서 1961년에는 '7성회'로 발전하였습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지지 시위를 벌이고 박정희에게 관심을 끌었습니다. 1963년 보스에게 절대 복종 등의 서약을 통해 하나회로 발전합니다.이후에는 육군사관학교의 각 기수별로 주로 경상도 출신 소장파 장교들을 대상으로 3~4명씩 회원을 계속 모집하습니다. 이후 1979년에는 육사 11기, 12기생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12·12 군사 쿠데타, 5·17 쿠데타를 주도하고 광주 민주화 운동의 탄압에 적극 참가했습니다. 1993년 육사 31기생 들이 동기회장 선출을 두고 하나회와 비하나회로 분열되고 충돌되는 사건이 벌어지는 사태에 이르릅니다. 김염삼 정부가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거쳐 1995년 12·12 및 5·18 사건 재판에서 핵심 인사들이 유죄 판결을 받아 해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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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하나의 나라로 보는 것이 맞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한민국 헌법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에 따라 현재의 북한정권은 대한민국의 영토내에 불법적으로 설립된 단체에 불과한, 북한 주민도 미수복 영토에 거주중인 대한민국 국민으로 해석됩니다.그러나 1991년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면서 국제적으로는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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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진대법과 비슷한 제도가 다른 나라에서도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역사에서 춘대추납의 구휼제도로는 고구려 고국천왕 16년(194) 때 을파소가 시행한 진대법(賑貸恒式)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도 유사한 제도를 시행했는데, 신라 문무왕 8년(668)의 대곡환상(빌린 곡식을 돌려 줌) 및 고려 왕건이 실시한 흑창과, 성종대의 의창, 조선의 환곡제도가 있습니다.그런데, 본래 구휼제도는 중국의 주나라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수와 당 시대에 완성된 진휼 기관이 있습니다. 즉 수 문제의 5년(585) 장손평의 건의로 각 주에 의창을 설치하였으며, 당은 태종 2년(628)에 대주(戴冑)의 건의에 의해 주·현에 의창을 설립하여 빈민을 진휼하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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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몇번째 공주 였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맏이로, <삼국유사>에는 형제자매 서열에 관한 기록이 없이 진평왕의 딸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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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신상담이라는 말은 어디서 유래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와신상담(臥薪嘗膽)은 기원전 496년 오(吳)나라 왕 합려가 월나라로 쳐들어갔다가 월왕 구천에게 패하고, 중상을 입게 됩니다. 병상에 누운 합려는 죽기 전 ‘부차’를 불러 이 원수를 갚을 것을 유언하였고, 부차는 가시가 많은 장작 위에 자리를 펴고 자며 복수를 준비합니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월나라 왕 구천은 기선 제압을 위해 오나라에 먼저 쳐들어갔다가 대패하고 역시 복수를 준비했는데, 구천은 잠자리 옆에 쓸개를 매달아 놓고 매일 핥으면서 쓴맛을 되씹었다고 하네요. 이와 같이 와신상담은 부차의 와신과 구천의 상담이 합쳐서 만들어진 고사성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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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최초의 절은 어떤것인지?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최초의 절은 고구려 수수림왕 때 375년 짓고 순도와 아도가 머문 '초문사'라고 하네요.그리고 전등사는 스스로를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사찰'로 자칭하고 있습니다. 전등사가 발행한 소형 홍보물에는 '우리 민족에게 불교가 전래된 시기인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 아도화상이 창건한 전등사는 민족의 역사가 살아 있는 강화도에서 1600여 년을 이어온 한국의 대표적인 고찰'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하지만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사찰' 법당의 최초 건물이 지금 남아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현존 최고 목조 건물은 12-13세기에 지어진 안동 봉정사 극락전으로 만약 전등사의 법당이 현존한다면 이는 봉정사 극락전보다 900여 년 앞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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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정말 남자와 여자가 평등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시대의 여성은 사회 활동에는 제한이 있었지만, 가정생활이나 경제 운영 등 일상생활에서는 남성과 거의 대등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었고, 호적에도 아들과 딸을 구분하지 않고 나이순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사위가 처가살이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음서의 혜택이 사위나 외손자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 <고려사>에서 '고려의 풍속은 차라리 아들을 따로 살게 할지언정 딸을 내보내지 않습니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족 호칭도 친가, 외가 구분없이 할아버지는 '한아비', 백수부와 외삼촌도 '아자비', 고모와 이모도 '아자미'로 불렀습니다.재산에 대한 권리도 남녀 간에 큰 차이가 없어서 재산은 자녀에게 균등하게 상속되었습니다. 결혼할 때 여성이 데려온 노비에 대한 소유권은 여전히 부인에게 있었습니다. 실제로 <고려사>의 손변이 안찰사로 있을 당시 고을 남매 소송 판결을 보면 아들보다 누나에 후하게 상속한 소송을 판결한 일화도 있습니다. 3남 4녀를 출산후 충선왕의 왕비로 시집간 '순비 허씨'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의 재가는 별다른 제한 없이 자유로웠으며, 재가한 여성의 자손도 거의 차별받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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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무신정권 때 팔만대장경을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조성한 초조대장경의 경판은 안타깝게도 1232년(고종 19) 몽골의 2차 침입 때 몽골군에 의해 남김없이 불태워졌습니다. 나라의 보물을 잃은 고려는 불타버린 대장경판을 다시 새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다시 새긴 대장경이라는 뜻의 재조대장경이라고 부르는데, 고려의 팔만대장경은 13세기 중반에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기를 기원하고자 국가가 주도하여 조성하였습니다. 강화 천도 이후 1236년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는 대장도감(大藏都監)을, 남해(南海)에는 분사도감(分司都監)을 설치하여 조판을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대장경의 조판은 대몽항쟁이 상대적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든 1238년(고종 25)부터 1247년(고종 34)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1251년 고종(38년)에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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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의 전개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귀주대첩은 거란의 3차 칩임(1018년 12월), 소배압(蕭排押)의 10만의 거란대군을 상원수 강감찬(姜邯贊) 등이 귀주에서 크게 무찔러 거란군의 전의를 완전히 잃게 한 전쟁을 말합니다.거란은 1018년 12월 거란이 제3차로 고려를 침입합니다. 이에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8천 대군으로 소배압이 이끄는 10만의 거란군을 맞아 싸웁니다. 흥화진 성의 전면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삼교천(三橋川)에서 패배하고, 남진하던 거란군은 자주(慈州 : 평안남도 자산) 남쪽에서 뒤쫓아온 강민첨의 공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습니다. 서경의 동북 마탄(馬灘)에서 대동강을 건너다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는 등 불운이 겹쳐 거란군은 전의를 거의 상실하였습니다.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도의 신은현(新恩縣)에서 회군해 연주(평안남도 개천)와 위주(평안북도 영변) 사이에서 청천강을 건너려 하자 강감찬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였습니다. 다시 귀주를 지날 때를 기다렸다가 김종현(金宗鉉)의 공격에 몰려 북으로 달아나는 거란군을 뒤를 추격해 귀주의 전면을 흐르는 석천(石川)을 지나 반령(盤嶺)까지 강감찬의 추격을 받은 거란군은 겨우 수천 명만이 살아 돌아가면서 고려가 승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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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관련해 질문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엘리자베스 1세의 튜더왕조의 2번째 왕인 헨리8세(1509-1547)입니다. 그는 아들을 낳고 싶어 6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였습니다. 첫번째는 스페인 공주 출신 캐더린, 두번째는 앤블린, 세번째는 시무어, 네째 아나 폰 클레페 공녀, 다섯째 캐서린 하워드, 여섯째 캐서린 파입니다. 그러나 그는 시모어 사이에 난 아들 에드워드 6세이 전부이고입니다. 딸 가운데 성인으로 성장한 자녀는 캐더린과 사이에 난 메리 1세와 앨블린과 사이의 엘리자베스 1세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에드워드 6세가 죽고, 언니 메리1세도 재위 5년만에 난소암으로 1558년 죽으며 그토록 미워한 자신의 후계자로 엘리자베스 1세를 지명합니다.엘리자베스 1세의 모친 앤블린은 외교관 토마서 불린, 어머니 하워드 가문의 엘리자베스로 헨리8세의 정비 캐더린의 시녀였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치적으로는 통일령을 선포하여 국교회를 확립하고, 구빈법 시행, 스페인 무적 함대 격퇴, 동인도 회사 설립와 문예를 장려하여 세익스피어 문학과 베이컨의 철학이 성과를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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