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모두 바뀌어도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기억이 바뀌어도 의식의 연속성이 남아 있으면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억만의 기준으로 보면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다른 기억이 이식된 경우는 더 이상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몸과 노의 연속성을 중요하게 보면 같은 육체와 같은 뇌에서 이어진 존재이므로 동일인으로 볼 수도 있네요. 하지만 철하적으로는 기억은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전부는 아니며, 기억까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뀌면 새 사람에 가깝다고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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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사전은 언제 만들어진걸까여?
사전을 처음으로 만든 곳은 기원전 23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군 수메르인입니다. 수메르인들은 수메르어-아카드어 대역 사전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수메르어와 아카드어를 나란히 적어 뜻을 익히는 식이었으며, 단어장의 성격이 강합니다. 사전은 서기관 양성과 문자 학습을 위한 교육용 자료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따라서 알파벳 순으로 정렬한 것은 아닙니다. 수메르 문자는 알파벳이 아니라 쐐기 문자로 오늘날의 철자순 배열과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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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는 팽월을 왜 그냥 방치했었나요?
팽월은 본래 거야 지역의 도적 무리에서 출발한 세력으로 위협적인 군벌 세력이긴 합니다. 하지만 항우 입장에서는 팽월의 잠재력을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제나라, 조나라, 유방 세력 등 더 큰 변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포섭하면 항우에게는 아군이 되어 힘을 보탤 수 있었으나 과소평가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팽월은 이후 유방을 도와 초나라 보급로와 후방을 계속 흔들어 항우게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 공로로 한나라가 초를 제압하고 중국을 재통일하는데 힘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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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에서 한신은 실제 왕족이었나요? 평민이었나요?
초한지의 영웅 한신은 평민 또는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추정합니다. 그는 본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로 알려졌으나 워낙 드라마틱한 출세로 '혹시 왕족, 또는 귀족이었나'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는 출신보다는 전쟁 능력으로 유명해졌으며,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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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왜 삼국처럼 하나의 강력한 국가로 통합되지 못했나요?
가야는 변한의 12개국을 기반으로 6가야로 발전했습니다. 3세기 여러 소국의 연맹체로 발전했지만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로는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각 가야 소국들의 독립성이 강했습니다. 따라서 자기 세력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중앙집권화가 어려웠습니다. 또한 지리적으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위치하여 두나라의 경쟁과 압박을 계속 당하고 있어 통일된 나라를 형성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즉, 외부의 세력의 간섭과 침략, 그리고 내부 분열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한 5세기 광개토대왕의 침략으로 연맹이 크게 흔들렸으며, 5세기말 대가야 중심으로 다시 연맹을 형성했지만 6세기 신라의 성장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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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도는 왜 신라의 국가 발전에 중요한 제도로 평가받나요?
화랑도는 신라의 청소년 수련 조직이며, 교육, 인재 양성 제도입니다. 삼국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전쟁을 수행할 인재가 필요했습니다. 화랑도는 이런 필요에 부합하는 조직이었던 것입니다.이런 이유 때문에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개편하여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인재, 군사 양성 기관으로 다듬었습니다. 용모와 행동이 뛰어난 청년을 화랑으로 선발하고, 화랑과 낭도가 집단 수련을 통해 상무 정신을 강화하도록 하였습니다. 세속오계 가운데 '임전무퇴' 정신은 기르는 데 중점을 둔 것입니다. 실제로 김유신처럼 화랑 출신 인물들이 통일 전쟁의 핵심 인물로 활약했습니다.즉, 화랑도는 젊은 인재를 도덕, 무예, 공동체 정신을 길러 국가 인재로 활용하였던 제도였기 때문에 삼국통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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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배우는 것이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역사는 본래 현재를 읽고, 미래를 예견하는 학문입니다. 역사를 배우면 현재의 정치 상황과 사회 모습을 과거에 비추어 파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의 문제는 갑작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라 과거로 부터 인과적으로 발생한 결과입니다. 이는 현재의 모습을 이해하는 배경 지식이 됩니다. 따라서 역사는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따져보는 훈련입니다. 이 과정에서 비판적으로 보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정치, 경제, 문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고,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학문입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 유성룡은 <징비록>를 저술하여 임진왜란의 실패와 혼란을 기록하여 미래를 대비하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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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왜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 문화를 만들었나요?
백제의 문화는 절제된 품격과 부드러운 세련미를 중시하는 문화를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특징 때문에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라는 평가와 상통하는 것같습니다.일반적으로 백제는 고구려의 강건한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중국의 남조와 교류하면서 세련됨이 더해진 것으로 판단됩니다. 남조는 강남으로 이동한 한족들의 왕조가 교체되었는데. 근초고왕 이후 동진과 관계를 맺은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교류했습니다. 고구려의 강건함, 신라의 소박함과 다르게 백제는 부드러우면서도 균형감이 있고, 은근한 세련미가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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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왜 산성을 중심으로 한 방어체제를 발달시켰나요?
고구려는 건국 근거지가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으로 산악 지형이 발달한 지역이었습니다. 즉, 지형이 험하고, 평지보다 산악에 훨씬 유리했으며, 이는 공격보다는 방어에 실전적으로 필요하였던 것입니다.고구려는 평소에는 평지성에 생활하다가도 전쟁이 일어나면 근처의 산성으로 들어가 싸우는 구조였습니다. 따라서 큰 하천과 산악 지형을 끼고 성을 쌓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군사적으로도 중국, 유목 세력과 지속적으로 충돌하다보니 읍성보다는 적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산성이 필요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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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서 맨손격투기 시합을 할때 어떤 형태로 승과패를 가렸나요?
고려, 조선시대 맨손 격투기를 수박, 수박희라 것이 있었습니다. 수박희는 상대를 먼저 넘어뜨리거나 균형을 무너뜨린 쪽이 우세합니다. 또한 목, 팔, 허리 등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승리로 인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 버티지 못하고 항복을 받아내거나 실력차 분명하게 드러나면 승패를 가립니다.오늘날의 격투기는 타격에 따라 점수를 부여하는 운영 방식이나 고려, 조선시대에는 군사 훈련, 놀이로서 성격이 큽니다. 그래서 기술보다는 상대를 제압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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