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인층과 서얼의 신분 상승운동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 중인층의 사회적 제약과 신분상승 운동 (1) 서얼 - 서얼은 양반의 소생으로 인구비중은 높았으나 성리학의 명분론에 따른 서얼금고에 의해 전문기술직 이외에는 벼슬길이 법제적으로 막혀 있었다. - 양반중심 사회구조에 가장 먼저 도전을 시작하였다. - 서얼통청운동(청요직 진출)을 전개하여 정조 때 정유서얼허통절목을 발표를 계기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 서얼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었다. - 1851(철종2년) 신해통공조치로 사관등용에 조치가 취하여져 서얼 문과 합격생의 승문원분관이 허용되어 완전한 청요직허통이 이루어졌다. (2) 중인(기술관, 서리) - 중인은 인구 면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 중인은 법제상으로는 문, 무과 응시가 가능하고 문관으로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었으나 중인과 서얼은 전문기술직에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중인과 동류로 취급되어 천대를 받아 실제로는 청요직 임용이 막혀 있었다. - 가계를 정리하여 족보를 만들었고, 서얼허통에 자극받아 1850년 대대적인 연합상소운동을 벌였으나 그 세력이 미미하여 실패하였다.2. 중인 계층의 성장 : 지위를 상승시키고 양반으로 진출하는 것이 확산되었고, 향촌사회에서 재력을 이용하여 향안에 오르기도 하고 나아가 수령과 밀착하여 기존의 재지사족의 권위에 맞설 정도로 성정하고 있었다. (1) 중인들의 성장과정 - 17세기 : 신분 고착화에 따른 비분강개로 표현되는 의식화 과정이 진행됨 - 18세기 : 직접 신분상승 운동을 전개하여 사회적, 문화적 영역을 확대하는 시기 - 19세기 새로운 시대사상으로 부상한 북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받아들이고 시인이나 문사로 자족하던 문화적 자기표현에서 경사까지 아울러 학습하여 지적 역량을 확대함으로써 士로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 개항 이후의 중인 : 서구의 근대문물을 수용하는 데 양반보다 앞서 나갔고, 서양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급진적 개화파가 대부분 중인층에서 나왔으며 뒷날 친일파가 많이 나타났다. 이것은 중인이 전문가로서의 공리적 출세지향적 기질과 관련이 있다. (2) 의관, 역관, 산관, 운관, 화원 등의 중인 계층 - 특히 수령으로 진출하였다. 조선 전기에도 의관 같은 중인들은 일정기간을 근무한 후에는 동반으로 올려주거나 간혹 공로에 따라서 수령 등에 임명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조선 후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 조선 후기를 중심으로 중인출신 수령은 217명 이상이 347개 관직 이상을 차지하였다. 그 중 의관출신이 과반수를 차지하였다. 다음으로 역관, 주학(=산학), 운관, 화원출신의 수령이 있었다. 화원은 임금의 초상을 그린 공로로써 특별한 은총으로 수령에 제수되었으나 그 때마다 양반들의 혹평을 받았다.3. 중인 계층의 신분상승 운동 (1) 세 갈래의 신분상승 운동 - 이들의 신분상승 운동은 상호 밀접한 연계선상에서 상호 지지와 경제적 지원을 통해 연대 발전하고 있었다. ① 서얼들이 주도하는 정치운동 성격의 통청운동 ② 기술직 중인들이 주도하는 경제운동 - 한의사, 통역관 등 기술직 중인은 그 직업적 특수성에 힘입어 새 시대에 각광받는 직업적 전문성으로 신분상승의 중요한 요인인 재력의 토대를 닦았다. - 연행사의 수행원으로 사무역에 종사함으로써 막대한 축재를 한 거부가 출현하였다. 박지원의 허생전에 등장하는 변승업은 이러한 부자로 실존 인물이었다. - 이들은 중인 계층의 최상층으로서 지하경제를 좌우하면서 재정적 후원자의 역할까지 담당하였다. ③ 서울의 이서리층인 경아전들이 주도하는 위항문학운동 - 18세기 후반 규장각 서리가 중심이 되어 위항문학운동을 대대적으로 확대시켜나가 18세기 말 옥계시사는 위항문학운동의 정점이었다. (2) 정부나 양반사대부 계층의 대응 - 기술직 중인의 경제활동에 대해서는 지하경제를 촉진시켜, 국가 경제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반체제적 행위로 간주되었다. - 서얼층의 통청운동은 당초 이들이 신분 하락시켰던 근본 의도가 양반 사대부층의 특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도태 작업이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원인 무효를 겨냥하는 위험 부담으로 여겨졌다. - 이서층인 경아전 중심의 위항문학운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다. 이는 조선왕조의 방향성에 부합될 뿐만 아니라 중인계층의 사회운동에 돌파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인식에 기인하였다. 나아가 양식있는 사대부들은 문화의 저변확산이라는 점에서 적극 후원하였다. 이는 문화국가라는 기본 전제에서 전후 복구사업을 추진한 조선 후기 사회가 18세기 영 ∙ 정조시대 문예부흥기를 이루어잰 대세와 표리관계로 그 맥락을 함께 하는 현상이었다. (3) 의의 - 특히 중인 중에서도 역관들은 청과의 외교 업무에 종사하면서도 서학을 비롯한 외래문화 수용에 있어서 선구적 역할을 수행하여 성리학적 가치 체계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의 수립을 추구하였다. - 이들 중간계층의 활동은 농민들의 움직임과 더불어 조선 후기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양반사대부계층에 대체되는 사회세력으로 성장하여 갔다. (4) 한계 - 기술관료라는 체질적 한계성으로 인하여 자기 학문화하였던 북학을 방법론으로만 이해함으로써 사회변혁세력화에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 북학사상을 완전 체득하고 새로운 사회의 이념 창출이나 방향성 제시에까지 이르려면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였는데 일제의 강점으로 그 역동성은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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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비싼 작품은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역사상 가장 비싼 그림이자 '남자 모나리자'라고 불리기도 하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한 손에는 수정공을 들고 한 손은 축복을 내리는 손동작을 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이 그림은 비싼 가격만큼이나 엄청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는데요.2020. 10. 1.'그림 한 점에 5000억?'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TOP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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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민주화운동에 궁금한 점이 있어요.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광주가 시발 점 본거지고 다른 곳 보다 저항이 거셌고 통치 기관의 중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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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장르 중에서 '재즈'는 어디에서 처음 시작(유래)하게 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재즈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아프리카와 노예 민요와 서아프리카 문화의 영향을 결합한 미국과 유럽의 클래식 음악의 해석으로 시작되었다. 각 연주자의 개인적인 해석과 즉흥연주 등으로 수년간 구성과 스타일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 이 역시 장르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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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있었던 삼별초는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무신정권의 특수군대로 1219년(고종 6년) 최우가 정치적 권력을 탄탄히 할 목적으로, 도적 예방 등 치안유지 명분을 내세워 야별초를 만들었으며, 그 숫자가 많아지자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고 후에 몽골군에서 탈출해 온 신의군을 통합하여 삼별초라 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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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민주화운동을 주제로한 영화에는 어떤영화들이 있는가요?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택시운전사 _ 독일기자의 경험담을 모티브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 ...꽃잎 _ 최윤 원작 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오래된 정원 ...박하사탕 ...나 다시 돌아갈래!26년 _ 강풀 원작 웹툰 '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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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삼두정치 하는 것이 어떤 형태의 정치를 말하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 1차 삼두 정치기원전 60년 평민파 수령 카이사르가 원로원 벌족파를 누르기 위해 장군 폼페이우스 부소 크라수스가 동맹을 맺고 집정관이 되어강력한 정치 행사2차 삼두 정치기원전 43년 카이사를 암살 후 안토니우스가 옽가비아누스레피두스와 함께 국가 재건 3인 위원회 만들어서 통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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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가 문화적으로 번영했다는데 군사력은 왜 약했나요?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군사력의 핵심인 절도사를 없애고 군부권력을 뺏고 억압해버림. 대게 무모한 짓 을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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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서 '콜라주'와 '프로타주' 기법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콜라주화면에 인쇄물, 천, 나무조각, 모래, 나뭇잎 등 여러가지 물질을 붙여 구성하는 기법이다.1911년경 입체파 시대의 피카소와 브라크는 화면 효과를 높이고 구체감을 강조하기 위해 화면에 그림물감으로 그리는 대신 신문지, 우표, 벽지, 상표 등의 실물을 붙여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의 파피에 콜레라는 기법을 개발해 냈다. 콜라주는 여기에서 발전한 것으로, 다다이즘에서는 파피에 콜레가 확대되어 사회 풍자적인 포토 몽타주가 생겨났다. 또한 막스에른스트는 옛이야기나 과학서적의 삽화를 오려붙이는 수법으로 초현실적인 콜라주를 확립하였다. 초현실주의는 엉뚱한 물체끼리 조합시킴으로써 별개의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비유적, 연상적 상징적 효과를 노렸다. 한편 1960년대 팝아트도 테크놀로지나 매스미디어 에서 대중의 시각 속에 있는 조형적 요소를 몽타주하여 작품 속에 짜맞춘다는 식으로 콜라주 수법을 이용하였다.프로타주나무판이나 잎, 천 따위의 면이 올록볼록한 것 위에 대고, 연필 등으로 문지르면 피사물의 무늬가 베껴진다.그때의 효과를 조형상에 응용한 수법.원뜻은 '마찰'이라는 의미의 프랑스 어 frotter에서 나왔다. 작자의 의식이 작용하지 않은 차원에서 유연히 나타나는 그 예기하지 않았던 효과를 노린다는 의미에서는, 데칼코마니나 타시즘, 혹은 오토마티슴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우연한 효과를 노리는 것뿐만 아니고, 몇 가지 피사물을 의식적으로 짜맞추는 경우도 있고, 혹은 거기에 나타난 무늬에서 힌트를 얻어 붓을 가하는 경우도 있다.이 수법은 우연이나 무의식을 존중하는 초현실주의에 의해 다루어졌다. 특히 독일 태생의 에른스트는 콜라주와 함께 이 수법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1926년의 <박물지>는 이 수법을 구사한 화첩으로서 유명하다. 그는 어느날 마루 바닥의 얼룩을 보고 있다가 거기에서 온갖 환각이 생긴다는 것을 깨닫고, 이 수법을 발견했다고 한다. <박물지>에서는 문질러 나타낸 나뭇잎이나 헝겊 따위가 인간의 머리, 괴물, 바다의 풍경 등으로 변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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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대왕이 있던시대에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는 같은나라였나요?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마케도니아 왕국(그리스어: Μακεδονικό βασίλειο) 또는 마케도니아(Μακεδονία)는 그리스 반도의 최북방에 있던 고대 왕국으로다른 왕국이지만 그리스 란 나라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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