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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달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부활절 토끼는 서양의 무속이라고나 할까요?게르만족의 에오스트레(Eostre)여신은 '봄의 새 생명을 가져오는 태양'을 의미하는 데,이 여신이 죽어가는 새를 토끼로 변신시켜 살려주었고,알을 낳는 토끼가 부활절의 계란과 토끼의 이야기로 전승되는 것 같습니다.에오스트레 여신의 이름은 영어 Easter(부활절)에 잘 남아있죠.독일 루터교에서는 이 토끼가 색칠된 계란을 숨겨놓는다고 전설을 이야기하고,아이들이 숨겨진 예쁘게 색칠된 계란을 찾도록 한다는 군요.에오스트레여신이나, 토끼나 계란 모두 새로운 생명을 의미하고,전설로는 다산을 의미한다고 하네요.풍요와 후손을 기대하는 마음이 담겨있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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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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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의 인물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질문자님의 생각이 맞는 것 같네요.사씨남정기 본문에 보면 두(杜) 부인의 아들 두억이라고 쓰여져 있으니,두억의 아버지 두씨의 아내가 되어 두(杜)부인이라 불린 것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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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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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는 왜 천재로 불리우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라틴어 세례명)Wolfgang Amadeus Mozart(독일어)오스트리아 궁정 음악가로 고전음악 작곡가였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짜르트는 딸, 나넬이 7살일 때, 건반악기를 가르쳤습니다.그런데 3살이던 모짜르트는 어깨 너머로 보고, 건반악기를 쳤죠 ^^아버지는 당연히 모짜르트가 신동임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직접 가르쳤다고 하네요.모짜르트는 4살 때, 이미 많은 곡을 익혔고,5살 때는 이미 작곡을 했다고 합니다. 뭐 이런 신동이?당연히 사람들은 믿을 수 없었죠.어린 모짜르트를 직접 시험해 본 사람들은 어린 모짜르트의 뛰어난 능력에 감탄했다고 합니다.아버지는 모짜르트를 6살 때, 뮌헨으로 연주를 보냈다고 하는 데, 이거 믿어지십니까?그러니 희대의 음악 천재라고 부를 만 하죠.독일은 물론이고, 파리, 런던을 다니며 연주하고 음악가와 교류하고, 작곡을 배우기도 했는데요.몇 살때 일일까요?1956년 1월 27일에 태어나 1964년에 우리가 음악의 아버지라 부르는 바흐를 만나 작곡에 대해 배웠다고 하니,모짜르트의 나이, 8세!!!모짜르트에게 하이든은 음악적 친구이자 스승이었는데, 1782부터 3년에 걸쳐 작곡한 6곡의 현악 4중주곡을 하이든에게 헌정하여 감사와 존경을 표했다고 합니다. 26세에 결혼28세에 그를 찾아온 베토벤(당시 14세)에게 1달간 가르쳐주었다고 하는 전기의 내용이 있으나, 정설은 아니라고 하네요.또 하나의 전설은, 모짜르트는 초안을 쓰고, 그것을 수정하는 방식이 아닌, 일필휘지로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아내가 그의 초안이나 수정본을 모두 없애버렸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희대의> 이런 표현에는 부정적 느낌이 들어있죠.모짜르트는 35년의 짧은 생을 살다갔으며,신동이 그럴 가능성이 많겠지만, 자유분방했고, 사치도 했고, 방탕했다고도 할 수 있고, 뭐 그렇습니다.18세기 사람이기때문에 아내 콘스탄체가 다른 남자와 재혼한 후에 쓴 모짜르트의 전기가 있지만, 그렇게 정확한 모짜르트의 삶을 증명할 방식은 찾기 어렵습니다.보석 박힌 옷을 입는 걸 좋아한다든지, 도박도 했고 뭐 그런 삶이었습니다.모짜르트의 음악활동은 그 분량에 있어서 상상을 초월합니다.교향곡, 협주곡, 콘체르탄테, 피아노 솔로, 바이올린, 현악사중주, 현악오중주, 실내악곡, 세레나데, 종교음악 미사곡, 성악곡, 오페라 등등모짜르트의 피아노협주곡 23번 2악장 아다지오https://youtu.be/xNwkBnExNr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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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2.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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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Guitar) 전문가님 질문있어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재미있는 질문이네요.통기타, 클래식기타, 어쿠스틱기타만 아니라 전자기타 중에는 일렉, 베이스기타이제는 스마트폰의 앱에서 기타를 실현한 것도 있죠^^통기타와 클래식기타의 차이점통기타는 5줄의 현이 모두 금속줄이고, 통기타는 6줄 현이 모두 나일론 성분같은 재질입니다.금속현이 내는 소리와 나일론 현이 내는 소리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겠죠.쇠줄 소리와 나일론줄 소리의 차이는 상상이 가시죠?마디의 수도 바디에 연결된 부분까지 14개와 12개로 다르기때문에 표현할 수 있는 음폭도 다르구요.주법도 코드반주법과 음계를 정확히 짚어서 연주하는 방법으로 차이가 있습니다.5줄 통기타를 연주하는 것과 6줄 클래식기타를 연주하는 데 연주법이 다른 것은 당연하겠죠.어쿠스틱기타는 통기타 소리를 전기제품인 스피커로 구현하기위하여 흡음할 수 있는 픽업장치가 된 것을 말합니다.통기타에 픽업이라는 장치를 설치해서 음을 흡수해 스피커에 전달하여 소리를 구현하는 것이죠.전자기타는 통의 울림을 배제하고, 픽업의 역할도 없이 전자기타줄 자체가 소리를 스피커로 전달하기때문에 울림음이 아니라 전자음으로 처음부터 구현됩니다.더 발전하여, 휴대용 기타연습기도 등장했죠.여기에 이제는 휴대폰 앱에서도 기타가 구현됩니다.마치 게임을 하듯이 앱에서 보여지는 현을 터치하면 기타음이 나오죠.통기타와 클래식기타는 전혀 다른 기타이기때문에 현을 바꾸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구요.첫입문자시라면, 배우기 쉬운 기타를 찾는 것보다는 가까운 기타학원을 찾으시기를 권해 드립니다.기타는 혼자 유튜브로 배우실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기초가 잡히지 않습니다.무슨 악기든 초기에는 기초를 튼튼히 해 놓아야합니다.그렇지 않고 손에 익히시면, 습관이 배이기때문에, 나중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고쳐지지 않습니다.1달만 딱 끊어서 강사가 시키는 대로 해 보시고, 적성에 맞다면, 3개월은 기타학원을 다니시기를 권해드립니다.기타는 강사에게 빌리시든지, 추천하는 아주 싼, 10만원 이하의 연습용을 구입하시기를 권해 드립니다.기타연습은 왼손가락들이 모두 물집이 생기고, 굳은 살이 박히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과하게 됩니다.학원에 학원비를 내는 게 아깝다고 생각되시겠지만, 학원비가 고통스러운 초기 연습기간을 버티게 해 줄 것입니다^^훌륭한 기타 연주가로 멋진 연주를 하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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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2.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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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의 NFT화하면 어떤 색다름이 있는지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예술가는 가난했습니다.이유가 무엇일까요?예술가의 작품성을 인정받기까지 너무나 긴 시간이 걸리기때문입니다.특히 예술가가 죽기 전에는 그의 작품이 계속 생산될 것이기때문에 가치상승이 힘을 받지 못했습니다.그래서 위대한 예술가들이 생계를 이어가기조차 힘들었던 경우가 많죠.물론 살아있는 동안, 가치를 인정받았던 예술가도 있기는 합니다.예술작품의 가치는 지구상에 NFT가 존재하기 전과 이후로 나뉘어질 것 같네요.왜냐하면, NFT는 예술작품의 창작자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기때문입니다.NFT 이전의 가난한 예술가는 NFT의 창작자 인센티브(NFT가 거래되는 매 거래 순간마다, 차액의 10%가 원작자에게 지급되도록 스마트계약되어 있습니다.)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자신의 작품을 싼 가격에 팔아야했습니다.그가 굶어 죽었거나 삶을 비관하여 자살했거나, 어찌되었든, 죽어야만 그의 창작물은 가치가 상승했습니다. 그렇다고 유족에게 상승가치의 일부가 제공되었을까요?전혀 그렇지 않습니다.지적재산권, 저작권, 창작권이 전혀 없었죠.그러나 NFT는 스마트계약 속에 창작자의 지적재산권을 거래차액의 10%라는 인센티브가 적용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창작자는 자신의 예술품을 NFT로 팔게 되면, 영원히 창작자의 지적재산권이 유지된다는 말입니다. NFT 이전에는 예술품을 소장한 사람이 차액을 모두 챙겼습니다.그러나 NFT 이후에는 창작자가 매번 거래될 때마다, 무한한 NFT창작자인센티브를 벌어들이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위대한 작품을 NFT로 변경한 후에, 그 값비싼 실물 작품을 소각해 버려도 전혀 손해보지 않는 것입니다.실물 작품을 소각하는 것이 그 실물 예술품의 NFT화한 작품이 더 차액을 많이 발생시키며 더 잦은 거래를 발생시킬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기때문입니다.차액이 클 수록, 잦은 거래가 발생할 수록, 창작자는 NFT원작자인센티브를 더 많이 벌어들이니까요.그래서 화랑에서 전시하는 실물 예술품과 달리, NFT거래소에서 온라인으로 거래하는 방식을 선택합니다.삼성전자는 새로운 플랫폼이 적용된 Smart TV를 선보였습니다. NFT작품을 소파에 앉아 리모컨으로 사서, 즉시 자신의 거실 벽, 스마트TV에 전시할 수 있습니다.당연히 플랫폼에서 거래요청이 오면, 리모컨으로 그 작품을 팔아버릴 수 있겠죠.그 예술품의 원작자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고 해도, 그의 계정을 유족에게 상속하고, 후손들은 영원히 NFT작품의 새로운 거래가 발생할 때마다 차액의 10%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어떻습니까?지금 당장, NFT작품 하나 만들어서, OpenSea에 올리고 싶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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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2.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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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영어가 세계 공용어가 됐을까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어는 대영제국시절, 영국 제국주의의 희생이었던 전세계 곳곳의 식민지들이 침략자들의 언어를 배우면서 확산되었다고 봐야겠죠.English는 England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앵글로프리지아어와 저지 게르만어가 섞이면서, 서게르만어군에 속합니다.자음 21개와 모음 5개로 아주 단순하며, 주변 언어들의 단어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어휘를 늘려갔습니다.5세기 앵글로색슨족이 섬나라 영국에 정착을 하게되고, 이어 바이킹이 침입하여 고대 노르드어가 섞였습니다.고대 언어가 중세 언어로 발전하는 동안, 12세기에 AEnglisc, Engle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하게 되는데, 중세의 종교적 영향으로,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가 모두 수용되면서, English라는 형용사형 명사가 됩니다. Engle+ish인 셈이죠.중세를 지나면서, 섬나라인 영국은 해양세력을 확장하면서, 주변 섬나라들과 다른 대륙으로 진출하게 되고, 이런 해양진출 경험은 영국의 문학적 표현을 풍부하게 만듭니다.영국 문학가라고 하면 셰익스피어가 떠오르겠지요?영국사람들은 셰익스피어와 인도식민지를 바꾸지 않겠다는 둥, 제국주의자의 오만함을 염치도 없이 드러내게 되는데, 이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들이 얼마나 강력한 문화적 영향력을 가졌는 지를 알게 합니다.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연극으로 공연되는 희곡이었으며, 문학으로서만 아니라, 미술, 음악 등 예술의 다양한 분야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근거한 창작이 이루어집니다.16세기의 셰익스피어가 영어라는 언어에 미친 영향은 너무나 놀라울 따름입니다.지금도 공연되고 있을 뿐 아니라, 수 많은 평론에서 셰익스피어의 창작물은 절대 비교대상으로 존재하죠.17세기의 명예혁명, 18세기의 산업혁명, 19세기 대영제국의 식민지 개척은,마치 알렉산더대왕이 그리스문화를 전세계에 심기 위한 사명감으로 세계를 정복했듯이,대영제국은 식민지들마다 영국화, 영어 사용을 요구합니다.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은 모국어보다 영어를 국가의 공용어로 지금도 사용하고 있지요.여기에 영국인들이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가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웠기때문에, 미국 역시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입니다.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는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미국이 2차대전 이후 초강대국이 되고, 특히 컴퓨터와 인터넷이 미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모든 도스 명령어와 웹 운영어가 영어로 만들어졌죠.그러나 사실, 미국내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도 전혀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전세계 각국은 다시 자민족의 언어를 제2공용어에서 제1국가 공용어로 회복시키고 있기도 합니다.이것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민족주의 영향이라고 생각됩니다.우리나라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외국인을 만나 영어로 대화하지 않고, 통역을 세워서 대화를 하는 것은 자국 민족주의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영어가 필수라고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베트남전에서 자국에 패배한 패전국, 미국의 언어를 아직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언어가 가진 힘은 그 속에 생활풍습, 문화, 사상, 철학이 그대로 표현되기때문에,문화식민지화되지 않으려면 자국 민족의 언어를 발전시키고, 세계 공용어를 제2공용어로 사용할 필요가 있겠죠.한국어가 7번째 유엔공식언어가 되길 기대합니다.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아랍어로 6개의 UN공식언어가 존재합니다.7번째 한국어가 되면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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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2.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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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허무주의가 바탕에 있다..?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52년에 썼습니다.2009년 8월 제가 플로리다에 있는 끝 섬, 키웨스트로 가서헤밍웨이가 살았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헤밍웨이가 여기에 살았던 이유는 그가 자신의 태어난 고향이 아니지만,<노인과 바다> 작품을 쓴 쿠바를 그리워하며 미국 땅 중에서 가장 쿠바와 가까운 이 섬에서 마지막 생을 마감합니다."나는 이 상을 받은 최조의 입양 쿠바인이다. 나는 그래서 행복하다"1954년 <노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의 수상 소감은 참 독특했습니다.그 전 해인, 1953년에는 퓰리쳐상을 수상했었죠.1939년부터 20년간 쿠바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도 탈고했죠.그에게는 두번째 고향도 있는데, 바로 스페인입니다.1936년 일어난 스페인 내전은 세계 지식인 5만여명이 몰려와 참전하게 된 전쟁이고, 헤밍웨이도 거기 있었습니다. 함께 이 전쟁에 참전한 지식인 중에는 까뮈, 사르트르, 앙드레 말로, 피카소, 조지 오웰, 파블로 네루다, 생떽쥐베리, 쇼스타코비치, 로버트 카파, 존 도스 파쏘스, 존 콘포드 등, 이들은 국제여단(International Brigades)으로 파시즘에 반대한 문화예술가들이었습니다.1938년 헤밍웨이의 모습입니다.스페인내전 참전지식인들은 스페인 공화파연립정부의 부패와 무능력에 전쟁참전을 후회하게 됩니다.지식인들이 총을 들었다가, 파시즘에 패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돕고자 했던 공화파의 부패와 무능을 경험하는 것은 큰 사고의 전환을 가져왔을 것입니다.<노인과 바다>는 사실을 근거로 쓴 것입니다.그레고리오 푸엔테는 헤밍웨이보다 오래 살았는데요.104세까지 살다가 200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헤밍웨이보다 2살 연상으로, 헤밍웨이에게 53일동안 한 마리도 못 잡다가, 큼직한 6마리를 잡았는데, 돌아 오던 해상에서 상어를 만나 모두 잃고 빈 손으로 돌아왔다고 말했고, 헤밍웨이가 그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다고 하자,돈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지금 술 한 잔만 사달라고 하며 허락했다고 합니다.이후에 헤밍웨이는 푸엔테를 찾아와 2만달러, 노동자의 7년치 급여로 집 2채를 살 수 있는 돈을 건넸고, 정색하며 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내던지고 도망쳤다고 합니다.헤밍웨이는 61세에 미국정부가 자신을 도청하고 있다는 망상에 시달리다가 권총 자살합니다.그의 자살때문에 그의 작품이 허무주의로 읽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질문자님은 잘 읽으셨다고 생각됩니다.소설의 말미에는 노인은 침대에 두 팔을 벌리고 지친 몸을 누입니다.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구원자의 모습을 그리려고 한 것 같습니다.전쟁과 정치의 이면을 경험한 헤밍웨이와 국제여단의 지식인들은 엄청난 갈등을 어떻게든 작품화해야했을 것입니다. 84일 동안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물고기였는데, 다시 바다로 나가야하는 것이 어부 노인의 삶이겠죠.그리고 잡은 큰 놈 하나 역시 인생의 한 부분일 것입니다.어쩌면 헤밍웨이가 스페인으로 가서 총을 들고 적과 싸운 이유이겠지요.그러나 그 인생은 상어 두 마리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고, 앙상한 뼈만 남습니다.노인의 손도 상처투성이이죠. 그 옆엔 노인을 바라보며 펑펑 울어주는 소년도 등장합니다."나를 살게 해 주는 건 그 아이야!""상어의 뼈가 저렇게 아름다울 줄은 몰랐다"고 감탄하는 관광객의 말 속에 헤밍웨이는 자신이 겪고 있는 삶의 아이러니를 꾹꾹 눌러 담아놓은 것 같습니다.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가치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헤밍웨이는 노인을 통해 인간은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소리쳐 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독자들은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통해 작품을 해석하게 되겠지요.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에서 총을 들었던 이유, 파시즘을 반대한 그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헤밍웨이는 쿠바 땅에서 이 작품을 쓰면서, 자신이 태어난 곳이지만, 인정할 수 없는 조국 미국이 인간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오늘 우리도 이 작품을 다시 읽는다면,나는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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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2.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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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성경에 노아라는 사람이 대홍수 후 방주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지 알아보려고 비둘기를 내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죠.비둘기는 귀소본능이 있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전령의 역할도 했구요.비둘기가 사냥을 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비둘기의 눈이 세상 선한 모양으로 보이기도 하구요.무엇보다 사람들이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많이 비유하고 언급했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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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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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는 어떻게 해석하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현대시를 해석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닐까요?그냥 몇 번을 읽어보시고 느껴지는 것으로 끝내는 거죠."독자가 없다면, 시인은 언어라는 독방에 갇힌 사람일 뿐이에요. ..... 당신이 있어 가끔은 삶이 새롭고 설레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시인 이민하의 말이다."시를 쓰는 나의 의도만큼 시가 자율적으로 향하는 길을 존중해 줘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고도 했다.전주에서 태어나 12살의 경험, 첫 등교하여 뒷자리에 앉았던 아이가 그 다음날 죽음으로 돌아오자, 성장기에 죄책감에 시달린 경험, 6학년 1년간 치료때문에 운동장을 내려다보아야만 했던 경험 등으로 국문학을 졸업한 후 지금까지도 오랜 기간 야행성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시인이 겪은 삶의 생채기가 진주가 되어 세상에 빛나고 있다고나 할까요?이민하 시인의 '키스論'이 해석을 도와줄까요?19금이라 여기에 올릴 수는 없구요^^만19세가 넘으셨다면, 검색해서 읽어보세요.시어를 분석해 보라고 한다면, 그냥 제 느낌이에요.붉은 -> 욕망, 입술의 색깔 빙산 -> 열정과 이성 사이, 또는 마음 속에서 요동치는 복잡한 생각들, 상대방 심리 파악마른 -> 긴장감, 입술이 바짝 바짝 말라들어가는성냥을 그어대는 두 개의 분화구 -> 아시겠죠^^오른쪽엔 바다로 가는 계단 -> 키스 후에 어떻게든 그 다음 행동이 요구되죠. 그 다음은 무슨 결정을 내릴까요?왼쪽엔 용암에 타는 나무 -> 바다와는 대조되는 선택지를 생각해 보시길.....찢어질 듯 양 날개로 헤엄치는 -> 시에서 구성의 클라이막스에 대부분 사용할 수 있는 표현들이네요. 찢어지는 감정들, 나비가 헤엄을 치는 게 아니라,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겠군요. 오른쪽 왼쪽 양 선택지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면, 그 다음은?목 잘린 나비 한 마리 -> 결국은 목 잘리고, 한 마리로 남겨졌네요.이민하 시인은,성장기의 죄책감, 타자 개념, 연애라는 3개의 카테고리 속에서 상처를 어떻게든 끌어안으려고 하고 있는 것 같네요. 이 말은 제가 시인의 말을 조금만 변형한 것입니다.시인은 어떻게든 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대화를 하기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시어로 표현해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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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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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한 구체적 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유태인학살은 오랜 기간동안 여러 지역에서 600만명이나 학살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이유가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그러나 굳이 이유를 말해야한다면,그것은 독일의 기술과 경제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물론 이것은 독일이 세계대전을 일으킨 이유이기도 합니다.우리나라에서는 지금은 아무도 관심이 없는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유럽의 지도는 너무나 단순했습니다.제국화된 국가들이 각자의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죠.제1차세계대전이 독일제국의 항복으로 끝나자,제국들이 해체되고, 각 국들이 독립하게 됩니다.독일제국은 해체되면서, 영토를 잃었고, 독일제국의 식민지였던 지역들은 모두 독립합니다.그러나 제1차세계대전은 독일과 러시아가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로 무장한 전쟁무기를 실험한 것이 되었습니다.독일제국 해체는 독일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이 때 등장한 아돌프 히틀러는 정권을 잡고 제3제국이라고 자칭하며, 독일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이 시기에 우리에게도 익숙한 '아우토반'이 건설되었고, 대규모 국가주도 사업이 실시됩니다.전쟁 이후, 세계는 대공황을 겪고 있었지만,독일은 경제가 활성화되었고, 실업자가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히틀러는 독일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아리아인 우월주의를 주창했고, 독일 시민들은 이에 환호했습니다.히틀러는 독일 내에 존재한, 롬인들(집시, 유랑 문화를 가진 북부 인도에서 기인한 사람들)을 아리아인의 우월성과 지도를 따르지 않는 존재로 여겨, 유태인 600만명과 함께 롬인들도 80만명 이상을 학살했습니다.인종차별주의는 슬라브족,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에게로 확대되었습니다.여기에는 전쟁훈련을 받지 않으려는 여호와의증인들도 포함되었습니다.당연히 아리아인 우월주의는 독일 내 유대인들에 대한 멸시로도 서서히 발전했습니다.독일제국의 영토에 있었던 나라이지만, 제1차세계대전 이후 제국이 해체되어 분리된 헝가리는 여전히 독일의 영향 하에 있었으며, 오스트리아 역시 인종차별주의가 나타났습니다.여기서 잠깐,조선과 동남아시아를 지배하려고 했던 일본제국도 인종차별주의에 근거하여 한반도를 병합했지요.일본 역시 메이지유신 이후에, 영국과 미국의 기술을 전수받아 아시아 최강국으로 발전해 있었습니다.일본에서 생산되는 전기제품은 일본 내에서 완전 소비될 수 없었고, 산업화는 소비해 줄 식민지가 필요했습니다.독일 역시 마찬가지였죠.히틀러는 독일 시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게토(ghetto)화를 진행합니다.아리아인 우월주의는 위에서 언급한 부류들을 강제 이주하는 방식으로 지역을 선정하여 집단생활을 하도록 합니다.게토화전략은 이들에게서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완전히 빼앗고, 그들 부류 내에서 스스로 위원회를 조직하여 자치하도록 만듭니다.다시 일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일본 역시 한반도에서 한민족을 게토화했습니다.여기서 다시 유태인과 한민족의 역사를 잠깐 살펴 보면,유대인들은 그들의 신념 속에 있는, 예루살렘, 시온이라는 개념이 있었는데, 기원전과 기원 후의 기로에서 로마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됩니다. 로마에서 추방 당한 역사도 있고, AD70년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되고 유태인들은 모두 철저히 추방 당하죠.이후로 유럽사회는 중세시대의 긴 기간 동안 유태인들을 예수라는 인물을 잔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기독교의 적으로 몰아갑니다.사실, 유태인들은 기독교를 전파한 사람들이지만, 로마의 국교로 승인된 이후, 기독교 경전인 성경에서 마치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인 것처럼 편집됩니다.팍스 로마나 체제에서 예수를 처형할 권한이 로마의 식민지 유태인들에게는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전혀 없었는데도 말입니다.유태인 혐오는 중세 교황의 치세 하에 끝 없이 발전해 왔고, 기독교 국가였던 독일이 독재자의 권력집중을 위해 이용하기에 가장 좋은 사상이 된 것입니다.2,000년 전, AD74년에 마지막 한 명까지 모두 자살하며 저항으로 마감했던 마사다전투의 경험을 가진 유대인들은이후 학대에 무저항으로만 임하게 된 역사적 경험이 있습니다.그 경험은 아우슈비츠로 알려진 수용소와 수 많은 수용소들, 그리고 독일의 영향 하에 있었던 과거 식민지로 강제이주될 때,조금의 저항도 없이 유대인들이 순순히 끌려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독일, 제3제국 독재권력은 이들보다 더 좋은 게토화 대상이 없었죠.인류 역사상 모든 독재자, 또는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통치자들이 사용하는 방식이 바로, 저항할 수 없는, 또는 저항하지 않는 부류들을 처형하여 광장에 목 메달거나, 화형시키고 그 현장을 시민들에게 오랫동안 노출시켜 자국 시민들이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독일의 시민들, 지식인들, 의사들, 정치인들, 심지어 종교인(목사들)은 나치의 정책에 자발적으로 동참합니다.일본의 한반도 게토화 역시 마찬가지였죠.한반도 5,000년 역사에 너무나 많은 전쟁을 겪은 한민족은 일본에게 스스로 나라를 내어줍니다.1919년 3.1운동도 무저항운동이었죠.그러나 한반도에 살던 우리의 조상들은 1930년대 유태인들과 달랐습니다.3.1운동 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만들어 졌고, 한반도 내에서도 중국과 러시아에서도 끝없이 일본에 저항했습니다.결과는 유태인학살과 비슷하게 노역으로, 731부대에 의한 인체실험, 일본군 징집을 당했지만, 무저항으로 일관되지는 않았죠.유태인은 우리 민족과 달리 국가체제가 없었고, 지식층은 이미 독일을 탈출하고 없었습니다.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탄생합니다.유태인들은 한민족에게 배운 것이 많았죠.무저항 속에 당한 학살과 한민족이 당한 학살은 확연히 차이가 있었습니다.우리 민족의 저항 덕분에 그들도 국가를 세우고 세계 최강의 군대를 조직하고, 세계 국가의 일원으로 등장하게 되었죠.지금도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이제 결론을 내려 볼까요?독일의 히틀러와 나치정권은 통치사상에 해로운 존재들을 게토화시켜서 독일 시민들의 눈을 가렸습니다.유태인과 롬인, 그리고 여러 사회적 약자들을 게토화시켜서 독일시민들이 나치정권의 통치사상에 적극 협조하도록 만들었죠.유태인들도 그들의 역사적 경험때문에 불의한 요구에 무저항으로 순응해 버렸습니다.그들의 무저항은 나치가 이용하기에 너무나 효율적이었죠.결국 유태인만 600만명을 학살할 때까지 저항은 없었습니다.일본 역시 메이지유신 이후에 일본 열도 내에서 감당하기 힘들었던 경제발전의 후폭풍을 미개한 조센징(?)을 게토화시키는 데 이용했습니다.쇄국정책과 동학혁명, 서구열강의 제국화에 힘을 잃은 대한제국은 스스로 미개함을 인정하고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했죠.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질문하셨는데,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입니다.한반도의 최근 역사에서 한반도 땅의 독재자들은 끝도 없는 게토화(약자를 범죄자 취급하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더 많이 죽음으로 내몰고 있죠)를 통해 시민들이 독재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독일계 미국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1963년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개념인데요.독일 나치는 가스밸브를 여는 사람이 그렇게 하면 유태인들이 죽는다는 것을 모르게 철저히 분업화했습니다.전범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했습니다.지난 80년간 한반도에서도 수 없이 많은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한반도에서 80년 동안 독재자가 자행한 학살에 희생당한 시민들은 50만명이 넘을 것입니다.어떻게 그렇게 많이 죽었느냐고요?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전혀 알지도 못하고 살 수 있느냐고요?독재자들은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게토화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기때문입니다.100년 전 독일에 살았던 시민들이나, 지난 80년간 한반도 살았던 시민들도 동일하게 게토화에 적극 동참했습니다.악의 평범성이죠.나는 죽이지 않았습니다.그저 나에게 주어진 투표권을 딱 한 표만 행사했을 뿐이지요.그러니 한 개인이 책임을 질 일은 아닙니다.한 예를 들어 볼까요?여전히 국회는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는데요.이 법은 2007년에 발의된 것입니다.어떻게 차별금지법이 14년 동안이나 국회를 통과하지 못할까요?바로 한반도에 사는 시민들이 게토화를 적극 지지하고 있기때문입니다.하루에 3명이 산업재해로 죽어나가도 산업근로자의 게토화는 계속 되어 왔습니다.2021년 드디어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었습니다.그러나 이 법으로 처벌을 받은 경우는 아직 한 건도 없습니다.생각해 보십시오.1명이라도 산업안전법을 어겨 사망하면, 그 회사의 모든 재산을 국가가 환수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그렇게 되면, 우리나라 산업계는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을 것이고, 그 결과 산업관련 비용의 증가로 인플레이션이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그래서 우리는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모두 악의 평범성 뒤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정말 마지막 결론으로,바로 나와 질문자님의 악의 평범성이 유태인을 학살하고, 지금도 여전히 한민족, 동족들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오늘도 내 형제 중 하나가 산업재해, 차별, 게토화로 몇 명이 사망했을 테니까요.
학문 /
철학
22.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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