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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우리나라가 일본과 사이가 온건했던 시절도 있나요?
안녕하세요. 박에녹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 민족이 건국한 나라들과 일본(또는 왜)이 평화롭게 지내거나 협력했던 시기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해양세력이었던 일본은 여러가지 이유로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했고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한반도가 있었기에 계속 반목과 갈등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속에서도 백제와 왜의 관계는 상당히 독특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고구려나 신라보다 백제는 훨씬 더 긴밀하게 왜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교류하고 있었고 이는 백제에서 왜로 건너간 사람들이 왜국에서 지배계층으로 고대와 삼국시대 그리고 백제멸망 이후에도 일정기간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과 신라의 협공을 받던 백제를 돕기 위해 많은 왜군이 동원되었던 것도 그것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인들과 일본역사가들은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고대 일본이 백제를 상국으로 생각했거나 백제 왕실과 일본 왕실이 혈통적인 연관성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로 볼때 백제가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일본과 평화롭게 지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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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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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은 왜 정몽주를 죽이기 까지 했던건가요?
안녕하세요. 박에녹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후기에 무신정권 시기를 거치면서 권문세족의 힘이 약화되었다가 원나라에 정치적 간섭을 많이 받던 시기에 다시 권문세족들이 친원파로 권력을 잡게 됩니다. 원나라에게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기 원했던 공민왕은 친원파 권문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성리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신진사대부들을 중앙정계로 진출시켜 자신의 정치적 우군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 시기에 이색, 정도전, 정몽주를 대표로 하는 신진사대부 세력들이 고려정계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권문세족들은 경제적으로 볼 때 대지주들이었고 신진사대부들은 지방호족들로써 중소지줄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원나라에 치우친 권문세족과 달리 성리학을 받아들인 신진사대부들은 원나라에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이후에 신진사대부 계층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자는 주장을 하는 세력과 고려를 지키면서 개혁하자는 세력으로 나뉘게 됩니다. 유교에서는 임금에 대한 충을 강조하기 때문에 많은 신진사대부들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일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력들의 대표인물이 정몽주였던 것이었습니다. 이성계, 정도전 등은 되도록이면 정몽주를 회유하거나 포용하여 조선을 건국하고자 했지만 이방원은 정몽주와 그 세력들을 그대로 두고는 새로운 왕조의 시작이 어렵다고 보고 결국 정몽주를 제거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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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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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권력자들이 왕이 되지 않고 권력만 휘두르는 경우 이유는 뭔가요?
안녕하세요. 박에녹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민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민주주의 국가들이 많아진 현대의 정치체제와는 달리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전제정치 하에서는 특히 혈통이 정치권력을 쥘 수 있는 가장 큰 명분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 강조가 군사를 일으키고도 스스로 왕이 되지 않고 현종을 왕위에 올려 명분을 지키면서 자신이 권력을 차지하는 등의 사례가 나타나게 됩니다. 조선시대에도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세운 반정이 있는 경우에도 새로운 왕을 세워 반란을 일으킨 세력이 명분을 유지하려고 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결국 왕이 통치하는 정치체제 하에서는 왕가의 혈통이 왕이 될 수 있다는 명분을 지키기 위해 실질적인 권력을 가진 권력자들이 스스로 왕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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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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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유배를 가서도 문학 작품이나 저술활동을 했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에녹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 유배는 큰 형벌이었지만 조선초기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과 그 후 사림파가 정치권력을 얻은 뒤에도 동인, 서인, 남인, 북인으로 나뉘어 당파싸움이 벌어지고 이는 영조, 정조 대에는 노론, 소론 등의 대립으로 심화되게 됩니다. 조선 중기에는 사림파 유학자들이 정치적 탄압을 받는 여러차례의 사화가 있었고 그 뒤 정치권력을 잡은 세력이 급격하게 몰락하거나 변화하는 환국이 여러 번 일어나게 됩니다. 이는 조선의 왕들이 왕권강화를 위해 사화와 환국을 일으키게 되지만 신하들의 세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어 어느 한 쪽 당파에 과도한 권력이 가는 것을 막으려는 왕들의 노력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한 당파들의 권력싸움 속에서 유배를 당하는 경우가 많아 유배지에서 지역을 이동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지만 유배지의 일정한 구역 내에서는 자유를 누릴 수 있어 저술활동과 과학탐구 활동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정약용이 대표적으로 유배지에서 많은 실학과 관련된 책을 쓰고 과학적인 성과물을 낼 수 있었던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배라는 형벌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지만 당파싸움의 결과에 따라 다시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있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가 어느 정도 허락되었을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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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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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영웅소설의 주인공은 고난을 겪나요?
안녕하세요. 박에녹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후기는 평민 및 중인(상인) 계층의 경제적 성장과 함께 각종 문화, 예술갈래들을 즐기고 누리고자 하는 갈망이 강하게 분출되는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발전한 것이 한글소설입니다. 중인 이하 계층에서 한글을 쉽게 배우고 쓰는 것이 대중화되면서 한글문학이 큰 성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병자호란, 임진왜란 등을 겪으며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심하게 받는 평민계층의 사람들에게 상상으로라도 통쾌한 승리를 경험하게 하는 영웅소설은 전쟁 후의 조선사회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영웅소설의 주인공들은 비범한 출생 이후 큰 고난을 겪고 이를 견뎌내고 큰 승리나 업적을 이루게 됩니다. 소설의 뒷부분의 영웅적 사건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영웅의 고난은 영웅소설에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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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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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띄어 쓰기는 언제부터 였나요?
안녕하세요. 박에녹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종대왕께서 한글 창제시에 발간한 훈민정음해례본에도 그 뒤에 나온 각종 서적의 언해본과 조선 후기에 유행한 한글소설들에도 띄어쓰기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근대전환기와 일제강점기에 주시경과 헐버트 선교사가 함께 한글을 연구하며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띄어쓰기와 마침표 등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한글맞춤법 규정 총칙 2항에서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한다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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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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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과 설화는 어떻게 구분을 지울수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박에녹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먼저 설화가 전설보다 상위개념입니다. 설화는 내용, 등장하는 존재의 성격, 듣는 사람들의 인식 등 여러 가지 요소를 기준으로 신화와 전설과 민담으로 나누어집니다. 신화는 신적인 존재가 등장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세상이 창조되거나 국가가 건설되는 등의 거대한 사건들로 마무리가 됩니다. 창세신화, 건국신화 등에서 그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신이며 신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신성한 장소가 등장합니다. 신화를 사람들은 진실로 믿으며 신성한 이야기로 받아 들입니다. 주로 민족적 범위에서 이야기가 이어져 가게됩니다. 전설은 영웅적인 존재가 등장하고 큰 능력을 발휘하지만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기장수 전설(설화)처럼 영웅적인 존재가 큰 능력을 드러내지만 비극적 결말로 이야기가 마무리되게 되는 것입니다. 주로 구체적인 장소나 사물이 증거로 제시되고 지역적 범위에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사람들은 진실되고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민담은 평범한 사람이 주인공이고 일상적인 이야기 속에 흥미를 유발하는 해학적 내용들이 주를 이룹니다. 평범한 인간이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실되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흥미롭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상의 설명을 통해 전설은 설화라는 큰 갈래에 하위 갈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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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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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는 정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책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에녹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유사는 일연 스님이 서술한 역사서입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기를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유사성이 있으나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 스스로가 삼국유사를 정사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삼국유사를 야사로 구분짓는 중요한 점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서술형식 상으로도 삼국사기는 동양의 정사들의 서술형식인 기전체로 구성되어 있으나 개인의 서술인 삼국유사는 편목 형식으로 으로 내용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설화와 신라향가 등이 수록되어 있는 것도 완벽한 정사로 인정받지는 못하는 요소가 됩니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관점에 후대 연구자들이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지만 당대에는 국가적 사업으로 삼국사기를 역사서로 기록한 것애 반해 삼국유사는 개인의 저작물로 인정되고 있어 정사로 확정되기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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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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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우왕은 왜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있었던 건가요?
안녕하세요. 박에녹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우왕의 혈통문제는 정사에서 언급되기 보다는 야사 또는 사람들의 소문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이런 소문들이 있었던 이유는 고려 공민왕이 왕비였던 노국공주 사후에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신돈이 고려의 정치를 좌우했던 것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특히 신돈이 공민왕에게 여종 반야를 바치고 그 반야에게서 아들을 얻었는데 이 아들이 모니노(왕우) 였습니다. 그런데 공민왕은 황실에서 아이를 키우지 않고 신돈의 친구인 능우라는 스님에게 아이를 맡겨 키웠고 갑자기 모니노를 후사로 세우고 이름을 '우'라고 칭합니다. 우왕의 어머니가 반야라는 부분에서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 아니냐는 주장들이 나오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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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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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엔 금주령이 있었다는데 지켜지지 않았던 이유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박에녹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금주령은 주로 흉년이 들었을때 내려졌습니다. 이는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상황에서 곡식으로 술을 만들어 먹는다는 것은 용납될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금주령은 주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깨졌는데 개인적인 일탈로도 볼 수 있지만 주로 금주령 하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오른 술의 가격으로 인해 권력자들과 상인 등이 밀주를 만들어 유통시킨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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