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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피하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하다라는 말은 별것 아니다, 하찮다 라는 의미의 경상도 방언 입니다. 혹은 시피하다 라고도 쓰이는데 '실력이나 수준이 비교 대상이 안 돼 가소롭게 보이다'정도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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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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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최초 도입됬을때 전화번호는 어땠을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최초 전화통화는 1896년 궁내부에 자석식 교환기가 설치되면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이어 1902년 3월 한성(서울)과 인천 간에 전화가 개설되고 한성전화소에서 전화업무를 시작함으로써 일반인도 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고 하는데 1945년 광복 당시 전화 가입자는 4만500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1960년대 9만5000여 명까지 증가했지만 대부분 수동식 전화가입자여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가 드디어 80년대 들어 통신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맞습니다. 1987년에 전국전화 광역자동화가 완성됐고 1997년에는 전화가입자가 최초로 2000만명을 돌파했습니다. 1970-1980년대만 해도 전화 번호는 02)xxx-xxxx 이런식으로 앞에 지역 번호가 있고 뒷자리가 7자리 였습니다. 그리고 전화 번호도 본인이 신청 하고 싶은 번호를 신청 해서 소유 가능 했고 그 번호를 백색 전화 번호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에 백색 전화는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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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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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의 역사는 어디에서 시작이 되었을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현대적인 주식 시장의 기원은 17세기 입니다. 17세기말,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주식 시장이 개설되었습는데 네덜란드에서는 동인도회사와 같은 대규모 기업이 주식을 발행하면서, 주식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다른 유럽 국가들도 주식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주식 시장이 개설되었으며, 이 시기에는 주식 시장이 발전하면서 현재의 형태에 가까워졌습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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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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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영토정복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토 정복 전쟁은 아니지만 세종 당시에 북쪽의 국경을 확정 하게 된 적은 있었지요. 서북면에 접한 명나라와 평화 국면에 접어든 조선은, 세종의 대에 이르러 대마도 정벌을 통해 왜구의 근거지를 소탕함으로써 변방에 안정이 찾아온 듯 했지만 동북면에서는 여진족의 빈번한 침입이 새로운 문제로 부각되었기에 이에 세종은 최윤덕을 보내 압록강 상류의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4군을 설치했습니다. 어서 세종은 두만강 주변에 여섯 성을 개척토록 하여 북방을 안정시켰는데, 이 일을 김종서가 맡았다. 김종서가 약 10년간의 노력 끝에 6진을 완수하고 나서야 조선은 비로소 안전지대가 될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북계를 확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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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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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땅에 지브롤터라고 영국땅이 있다는데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스페인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이후에는 카스티야 왕국(스페인 왕국) 통치했으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영국이 점령했고 위트레흐트조약으로 지브롤터의 영유권을 따냈다고 합니다. 이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영국은 대서양으로 나갈 수 있는 지중해의 유일한 출구를 장악, 지중해 해상권을 쥐는 기초를 마련하였는데 영국의 속령(그 중에서도 해외영토)으로 고도의 자치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현지 정당과 정치인들로 구성된 자치의회와 자치정부를 보유하고 있고 영국의 속령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총독 (Governor)을 두어 국가원수인 영국 국왕 의 대리인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총독 자리에는 가끔씩 현역 군인이 보임되기도 하는데 중장급으로 지역의 중요성이 중요성이니만큼 꽤 격이 높은 편입니다. 현 제임스 더튼 총독은 영국 해병대 사령관 출신으로 해병 중장까지 지낸 퇴역 장성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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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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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족들의 후손들이 명맥을 이어가고있는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한제국 황실 재산은 1945년 광복 후 모두 국유화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국회가 1945년 9월 23일 ‘구황실재산처리법’을 제정하면서 구(舊)황실재산사무청이 설치됐고, 1950년 4월 8일 ‘구왕궁재산처분법’이 제정되면서 과거 이왕직에서 관리했던 황실 재산은 국유로 하며, 존치할 필요가 없는 재산은 매각·대여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고 합니다. 1960년 구황실재산사무총국 화재로 황실 재산의 목록이 남아 있지 않은 만큼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유추할 수밖에 없는데 구 황실의 재산은 당시 기준으로 5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광복 직후 쌀 1가마 가격을 기준으로 당시(300원)와 현재(20만원)를 비교해 보면 이는 약 35조원에 달하는 수치이니 어마 어마 하다고 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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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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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촬영 기사이기도 한 이필우가 촬영과 음향을, 이명우가 감독과 연출을 맡아 제작에 들어가 1935년 10월 4일 서울 단성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가 개봉했는데요. 그 작품은 바로 '춘향전'이었습니다. 당시 이필우, 이명우 형제는 PKR발성 장치를 개발 하게 되었고 이를 영화에 적용 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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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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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 여기서 회수는 어딘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귤화위지 (橘化爲枳) 고사에 등장하는 회수 (淮水)가 바로 화이허다. 화이허를 기준으로 북쪽은 날씨가 추워 귤 농사가 잘 안 된다고 합니다. 화이허강 혹은 화이허는 화북과 화남 지방의 경계가 되는 지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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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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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까지 서울 밤섬에 사람이 살았다는데..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밤섬의 역사가 은근히 길어서 고려 시대에는 이곳 밤섬이 귀양지로 쓰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뽕나무를 많이 심어서 '서잠실' 또는 당시 여의도의 별칭인 나의주(羅衣州)에 상응하여 율주(栗州)로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약 천 명 가량이 살았고, 폭파 직전에는 62가구 443명의 주민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나룻배를 이용해서 육지와 왕래를 했을 것으로 추정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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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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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목마는 전설인 줄 알았는데 유적이 발견되어 역사적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쿠레타섬의 미궁도 실제했을 가능성에 있지 않을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많은 고고학자들은 신화라고 아직도 믿고 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고전학자인 Armand D'Angour 박사는 "트로이 목마는 상상력이 풍부한 우화로, 아마도 고대 공성 병기에 불이 붙는 것을 막기 위해 축축한 말 가죽을 입힌 방식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 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크테타 섬의 미궁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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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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