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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영국간의 전쟁이었던 100년전쟁이라는게 실제로 그 기간이 정말 100년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년 전쟁은 사실 100년이 아니라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이라는 기간동안 잉글랜드 왕국의 플랜테저넷가와 프라스 왕국의 발루아가 사이에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일어난 일련의 분쟁 들을 총체적으로 부르는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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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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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애니메이션으로만 접했던 '광주학생운동'의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9년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한 광주 학생들의 항일 기운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고 그러던 1929년 3월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김몽길(金夢吉)·여도현(呂道鉉) 등이 교규 문란의 이유로 퇴학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이 사건으로 교내는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며 긴장이 계속되다가 광주학생동맹휴교 1주년이 되는 6월 26일 5학년을 비롯하여 2·3학년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하학하는 사태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일학생간의 대립은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반경 광주발 통학열차가 나주에 도착하였을 때 폭발하였다고 합니다. 이날 나주역에서 통학생들이 집찰구로 걸어나올 때 일본인 학생 몇 명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학생 박기옥(朴己玉).이금자(李錦子).이광춘(李光春) 등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모욕적인 발언과 조롱을 하였고 그때 역에서 같이 걸어나오고 있던 박기옥의 4촌 남동생이며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생인 박준채(朴準埰) 등이 격분하여 이들과 충돌하였다. 그때 출동한 역전 파출소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며 박준채를 구타하였다.이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인 최희선(崔熙善).김보섭(金普燮) 등 10여 명이 박준채와 합세하여 한·일학생간의 대결이 계속되었으나 더이상의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11월 1일의 광주역사건으로 사태는 급전되었다고 합니다. 당일 통학생도 아닌 일본인 중학 5학년 학생 4, 5명이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정세면(鄭世勉)에게 도전해 옴으로써 한·일학생간의 충돌 사건이 다시 일어났는데 양교의 교사들이 충돌 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현장에 왔으나 일본인 중학교 교사들은 중학생들을 오히려 선동하였으며, 교사끼리의 교섭도 일본인 중학교 교사들의 교만한 방언으로 옥신각신하다가 간신히 동시 퇴각을 결정하였다고 합니다. 그 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이러한 사태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학교로 돌아가 5학년 학생 노병주(盧秉柱)와 통학생 단장 채규호(蔡奎鎬) 등이 사실을 보고하고, 의견을 교환하였으나 묘안 없이 귀가하였고 11월 2일 하학 열차에는 양교 교사와 경찰이 동행하였으며, 아침에는 전라남도 지사가 양교 교장에게 통학생들에 대한 엄중한 감독을 지시했으나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형식적이며 관료적 차원에서의 수습책이 광주 학생들의 굳은 민족 의식에 기조를 둔 대일항쟁정신을 퇴화시키거나 변질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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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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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국 일본 모두 한자를 사용하는 나라입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시대 이후 중국에서 건너 온 번체자를 우리는 아직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오 같이 이렇게 오래된 형식의 번체자를 쓰는 나라가 대만, 홍콩, 한국 입니다. 중국대륙은 현재 1950년대 마오저뚱이 외국인들이 쉽게 배우고 익히게 하기 위해서 약자인 간체자를 도입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 나라에서 건너 간 한자어를 자기 들만의 방식으로 약간씩 변형 시켜 사용하고 있지요. 그래서 사실 우리가 쓰는 한자어 정통 한자어라고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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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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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국민인 마자르족은 훈족의 일원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마자르 족이란 헝가리인의 원류가 되는 우랄어계 부족인데 기존에 우랄 산맥남쪽에 모여살다가 기후 변화와 여타 유목민족들의 압박으로 점차 서쪽으로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인근의 불가르, 하자르, 슬라브족과 차별화하기 위해 이러한 명칭이 생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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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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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키즈칸 이후의 몽골제국은 왜 쇠퇴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몽골 제국은 너무나 거대했습니다. 몽고의 멸망은 역참제도의 부패가 주된 원인인데 역참은 전통시대 공공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설치된 교통 통신기관인데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 전달, 변방의 긴급한 군사 정보 및 외국 사신 영접, 공공 물자 운송 등을 위하여 설치된 교통 통신기관입니다. 원나라는 동쪽으로 고려, 서쪽으로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영향력이 확장되어 있었는데 인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그러한 국가의 규모가 아니었 습니다. 때문에 몽골제국은 국가운영 대책방안으로 역참 제도를 실시하여 순전히 역참에 의존해 거대 국가를 운영했던 것입니다. 몽골제국 초기 물자 운송에만 이용되던 역참이 국가 행정을 위한 문서 전달에도 이용되면서 그 사용빈도가 증가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역참 운영을 책임지는 참호들의 부담이 커지고 이와 더불어 역참이 남용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합니다. 역참 이용 증명서 없이 자신의 직위를 내세워 역참을 이용한다든지, 상인들이 고위관직과 의기투합하여 역참을 이용하는 사례가 많아졌고 당시 국가는 너무나 거대했고 역참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이러한 역참 남용을 금하려 해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역참 운영의 책임은 순전히 참호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 역참을 버리고 도망치는 참호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결국 국가운영의 전반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역참의 기능이 악화되면서 몽골 제국은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고 이후에 명을 건국한 한족에게 전쟁에서 패배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 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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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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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족보는 보통 시조부터 시작하고 있으나, 문서화가 이루워지기전 이름 등 내용을 어떻게 알고 기록하였을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에는 족보가 없었습니다. 족보가 처음 출현한 것은 1423년(세종 5)으로 이때에 간행된 문화 유씨 (文化柳氏)의 ≪영락보 永樂譜≫가 최초의 족보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즉, 조선 초기 기록된 족보에는 전부 다 한자 로만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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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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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문화가 일본의 하쿠호 문화에 끼친 영향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특히 불교 문화에서 많이 보여 지는데요 원효, 강수, 설총 이 발전시킨 불교와 유교 문화는 일본 하쿠호 문화의 성립에 기여하였습니다. 특히, 심상에 의하여 전해진 화엄 사상은 일본 화엄종을 일으키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8세기 말에 이르러 일본이 수도를 헤이안으로 옮긴 후부터는 외국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하쿠호 (白鳳) 문화 7세기 후반에 발달한 일본의 고대 문화로, 당과 통일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불상, 가람 배치, 탑, 율령 과 정치 제도에서 그러한 점이 보여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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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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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유럽과 최초의 교역을 하던때는 언제인지?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 나라가 유럽과 처음 교역한 것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고려말 벽란도에서 거래를 할 때 대식국등 페르시아 및 중동 지방 사람들도 거래를 하러 왔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터어키등지의 상인 들도 벽란도에 들어 왔을 것으로 추측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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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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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는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떻게 승려가 되었던 건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사의 출가 동기는 어러가지 말들이 많습니다. ‘석장비명’에서는 그가 13세 때 황악산 황유촌 문하에서 <맹자>를 배우다가 ‘세속의 학문은 저속하다’고 탄식하면서 불가로 귀의하였다고 한다고 전해 집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지은 시나 상소문에서 ‘문호의 영락과 부모의 서세 때문’에 승려가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가 신묵화상에게로 정식 출가한 것은 부모가 돌아가신 후 16세 이후의 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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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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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국제 영화제의 연원 및 변천과 행사 내용, 의의와 평가 등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1996년 제1회 대회의 대흥행으로 전국적인 인기를 끌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셀 수도 없이 유사 영화제(광주국제영화제, 여수국제해양영화제, 춘천국제영화제, 충무로국제영화제 같은 영화제들)가 우후죽순으로 생겼다가 대다수가 사라졌으며 부천국제 영화제와 , 전주 국제 영화제등이 괜찮게 남은 편입니다. 영화 상영과 이벤트가 서로 이원화가 되어 불편함을 겪었는데 그 이유는 부산 시가지 남쪽과 동쪽 끝에 있는 남포동과 해운대 간에는 어림잡아 1시간이 넘는 이동 시간이 걸렸기 때문 입니다. 결국 영화의 전당 등 핵심 시설이 완공된 2011년 16회 BIFF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운대 일대에서만 모든 것을 진행 및 상영하였다가, 남포동 일대 상인들의 엄청난 반발로 인해 2012년 17회부터는 메가박스 부산극장이 다시 상영관으로 추가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역부족이였는지 2017년 제22회부터는 새로 개관한 부산영화체험박물관을 포함해 비프광장에서 각종 행사를 추가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이후 2019년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부터는 롯데시네마 대영 상영관으로 공식 상영작들을 다시 상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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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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