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스톤헨지는 누가 어떤 용도로 쓰기 위해서 만들어진 건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스톤 헨지는 기원전 2000년 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거석의 용도에 대해서는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존하는 문서들 중 스톤헨지에 대해 언급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130년 헌팅던의 헨리(Henry of Huntingdon)가 쓴 『앵글인들의 역사(Historia Anglorum)』인데, 여기서 저자는 "누가 무엇을 위해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유적"이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그 새김새나 만들어지 시기 등으로 미루어 볼때 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고인돌과 같이 죽은 사람을 위한 무덤이지 않았을까 라고 추측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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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자화상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있긴 합니다. 바로 윤두서가 직접 그린 자신의 자화상의 대표작인데 크기는 가로 20.5㎝, 세로 38.5㎝입니다. 윤두서(1668~1715)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정약용의 외증조로 조선 후기 문인이며 화가입니다.종이에 옅게 채색하여 그린 이 그림에서 윤두서는 윗부분을 생략한 탕건을 쓰고 눈은 마치 자신과 대결하듯 앞면을 보고 있으며 두툼한 입술에 수염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화폭의 윗부분에 얼굴이 배치되었는데 아래 길게 늘어져 있는 수염이 얼굴을 위로 떠받치듯 표현 했습니다. 숙종 36년인 1710년에 그린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상 조선시대에 그려진 자화상중 남은것 중에서 최고의 수작으로 꼽힌다. 강세황도 자화상을 그려서 전하지만 윤두서의 것과 비교하면 세밀한 묘사나 표현력에서 모자라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 자화상이 서양에 비해서 적은 이유는 나보다는 상대방 혹은 우리를 중심으로 하는 동양 사상에서 '자아와의 대결'이라는 명제가 쉽지 않기 때문 입니다. 사실적 섬세한 묘사를 중요시하는 화단에서 탁월한 관찰력과 기량이 겸비 되야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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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란 말의 유례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말 '메뚜기' 는 산이라는 의미를 가진 고유어 '묏 (山)+뛰기' 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산에서 뛰어다닌다는 특성에서 유래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농경문화를 주도했던 인도의 말 'metti'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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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또가 일하는 관청의 이방과 같은 하급관리직도 녹을 받았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지방 향리를 비롯한 토착세력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큰 목적이기에 조선이 추구하던 중앙집권화에 큰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녹봉과 토지를 안 주었다고 합니다. 어차피 대다수의 향리들은 땅을 가지고 있는데다 지방 유력자로 지내다보니 재산도 많아 녹봉을 안줘도 먹고 사는 문제가 크게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향역을 수행하면서 드는 비용이나 지방 관아의 경비, 수령을 맞이하고 보내는 직무를 수행하면서 드는 비용을 모두 향리가 부담하고 이행하지 않을 경우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향리들이 온갖 수단을 써서 향역을 피하려 들었고 향역에 들어가는 경비를 메꾸려고 수작질을 부리거나 백성들을 침탈하였다고 합니다. 사실상 조선 시대 지방행정 부정부패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들 외 아전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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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할 수 밖에 없는시대적.사상적 배경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조선은 수많은 외세 관련 사건들이 터져 나옵니다. 제너럴셔먼호 침략사건,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사건,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같은 서양의 무력 도발은 당연히 흥선대원군으로 하여금 쇄국정책과 국방력 강화 후문호를 개방해야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고 합니다. 쇄국 정책으로 조선이 개화의 흐름에 대비하지 못해 멸망하고 일제 강점기, 남북분단,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을 겪어야 했던 것에는 흥선대원군이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흥선 대원군도 나라를 생각 하는 마음은 누구 보다 더 했지만 그 방법이 쇄국이 아닌 조금 더 적극적인 문호 개방 이였다면 어땟 을 까 하는 생각을 가벼이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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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셰라는 말은 어디서 쓰인 단어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클리셰란 19세기 초반 인쇄 업자들이 쓰던 용어로써, 반복적으로 사진이나 인쇄물을 찍어 내기 위해 만들어 놓은 틀입니다. 불어에서 온 말인데 '상투적 문구' 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상투적인 문구라는 것은 너무 나도 당연하고 속담도 아니고, 격언도 아니지만 굉장히 뻔하고 자주 쓰이는 말 들입니다. 이런 게 바로 Clich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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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은 노르망디 상륙 장전를 모방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네에 맞습니다. 인천 상륙 작전은 2차 대전 당시 노르망디 작전을 모방해서 1950년 9월15일 미국 맥아더 장군이 7만5천만의 병력과 261척의 해군함이 투입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규모로만 보만 노르망디가 6천여 척의 배가 동원 됬으니 노르망디가 수십배의 규모 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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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통치의 개념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탁통치( / Trusteeship)란 U.N의 신탁을 받은 국가가 유엔 총회 및 신탁 통치 이사회의 감독을 받아 일정한 지역이 자체 통치 능력을 갖출 때까지 대신 통치해 주는 제도로, 유엔 헌장 제12장, 제13장에 규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1945년 12월 모슼바 3상회의 결과가 알려지자 신탁통치에 반대하여 일어난 국민운동도 일어 납니다. 1946년의 남한 지역은 찬탁과 반탁 진영 사이의 갈등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김구의 임정 세력은 신탁통치 반대운동(이하 '반탁운동')을 '제2의 독립운동'으로 간주하고 국민 총동 원령을 내렸는데, 이는 반탁 운동을 통해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도에 의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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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이 정권을 어떻게 잡았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박정희와 그의 부하 장교들이 벌인 구데타가 바로 5.16 군사 정변입니다. 이 사건은 1961년 5울16일 당시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그의 휘하 장교들이 예비사단 병력과 포병단, 해병대와 육군 제 1공수 특전단 등을 동원하여 19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을 비롯 대구, 부산 등의 방송국 등 주요 시설을 무력으로 점거하였습니다.1962년 3월 24일부터 1963년 12월 16일까지 윤보선 대통령의 사퇴로 제2공화국의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으며, 제5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1963년 12월 17일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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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트리나 2세는 러시아 출신이 아닌데 러시아 여제가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군주로, 본래는 프로이센 슈테틴 출신의 독일인이었다.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으며, 1762년 남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차르(차리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이렇게 반란에 성공한 이유는 그녀는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예카테리나는 결국 1762년 6월 표트르 3세가 덴마크와의 전쟁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운 사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러시아 제국의 황제임을 만천하에 알렸다고 합니다. 표트르 3세는 체포되어 8일 후에 감옥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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