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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센델 교수가 한 때 한국에서 화제였는데요 어떤 점으로 인해서 화제가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2010년 이후 한국에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켰지요. 27세에 최연소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고, 29세에 자유주의 이론의 대가인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이 유명 해 졌습니다. 마이클 샌델은 결론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정의론이 설명됩니다. 우선, 사람들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공리주의, 둘쨰,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마지막으로, 정의를 행복의 합계나 자유 보장으로 단순히 설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다양한 도덕적, 종교적 가치에 대한 논의로부터 공동체 구성원의 좋은 삶과 공동선에 대한 답을 천천히 찾아보자는 공동체주의로 요약 되며, 마이클 샌델은 세 번째 공동체주의, 미덕 추구의 입장에 더 ㄱ깝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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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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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에 한자가 많이 사용되는건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일본어가 만들어져서 그런건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도 한자를 한떄는 겸용해서 사용한 적이 있지요. 지금은 한자를 우리 생활에서 최대한 안쓰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 생활에 한자어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도 마찬 가지 입니다. 일본도 한자폐지를 검토한적이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보류로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한문을 사용했기 때문에 많은 한문 용어가 일본어에 많이 사용 되고 있다고 합니다. 카도카와 국어사전(角川国語辞典)의 6만218개의 단어중 한문에서 유래된 단어가 전체의 55%를 차지하는 3만3143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현재 사용 중인 단어를 한꺼 번에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쓰고 있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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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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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군대 계급은 어떻게 되어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에도 지금 처럼 계급이 많이 있었습니다. 현재 계급과 비교해서 정리했습니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1. 군사령관(합모총장) : 종 1품 제조 2. 군단장(대장) : 정2품 도총관, 도원수 3. 군단장(중장) : 수군 통제사, 내금의장 4. 사단장( 소장) : 병마 절제사, 수군 절도사 5. 연대장( 대령급) : 군호, 수문장 6. 대대장(중령급) : 만호 7. 중대장( 소령급) : 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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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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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인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도 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은 그가 묻힌 능으로도 알수 있습니다. 융릉은 왕으로 추존된 장조(사도세자, 장헌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능이며, 건릉은 장조와 헌경왕후의 아들이자 조선 제 22 대 왕인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입니다. 사도세자로도 잘 알려진 장조는 정조가 즉위한 후 장헌세자가 되었고 고종에 의해 장조라 추존하면서 무덤의 이름도 변모하였다고 합니다. 정조 임금의 효심을 생각하면 떠올릴 수 있는 또 하나의 문화재가 바로 수원화성 입니다. 역사문화관에서는 수원화성과 용주사도 함께 안내되어 있습니다. 그의 깊은 효심은 또 수원 화성과 용주사에서도 찾아 볼수 있습니다. 수원 화성은 1796년에 정조가 당시 과학적 기술로 만든 신도시로, 바깥으로 방어 시설을 갖추었다고 하네요.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 융릉 (당시 현륭원)을 조성하면서 1790년에 근교에 있는 용주사를 중건하여 무덤을 지키는 사찰로 정하였습니다. 용주사에는 부모님의 은혜를 기린다는 내용의《불설부모은중경판 佛設父母恩重經板 》등 정조 시대의 유물이 다수 남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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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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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사위는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공주 혹은 옹주의 남편을 부마 혹은 부마도위라고 했습니다. 이런 부마는 신라에서는 적자가 없거나 순서를 양보하는 경우 부마가 왕위를 잇기도 했다고 합니다. 신라 왕위를 성씨가 다른 박, 석, 김이 번갈아가며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성이 바뀌는 부분은 대부분 전왕의 사위로서 왕위를 이은 형태입니다. 정말 특이한 경우이며 고려, 조선에는 이러한 경우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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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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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은 궁국적으로는 전쟁을 할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최근 대만을 두고 날카 롭게 대치 중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날 것으로 보는 가능성은 희박 합니다. 그 이유는 중국과 미국이 전쟁을 하면 3차 대전이 되기 때문 이고 이는 곧 핵 전쟁을 의미해서 지구가 멸망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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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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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은 존재했던 걸까요? 증거가 몇개있던데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거인 들이 실제로 존재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고고 학자들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현대의 인간보다 최소 3배나 거대 했다는 거인들은 약 200년 동안 북미 지역 고대 유적지 에서 2미터가 넘는 유골이 1000개가 넘게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1890년대 호아이오 주에서 발견된 기원전 321년에 살았던 거인 유골 1959년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발견 되어 카네기 박물관에 보관된 2.2미터 의 거인 유골 과 1897년 오하이오 주에서 발견된 2.4 미터의 거인 유골등이 바로 그 증거 라고 합니다. 1933년 미주리 주에서 발견된 2.5 미터의 거인 유골. 2012년 오하이오 주의 몽고메리에서 발견된 2.7미터의 거인 유골. 1895년 샌디에이고에서 발견된 2.7 미터의 거인 유골.이렇게 거인의 유골이 발견되어 언론을 통해 알려진 이야기도 있지만 성경의 창세기에는 노아의 홍수 전후에 등장한 네피림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아르메니아의 바벨탑 을 만드는 데에 도움을 준 거인 종족 그 외에도 발트 신화 바스크 신화 불가리아 신화 그리스 신화 속에서 도 거인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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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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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삽살개가 귀신을 쫓는 개로 된 것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삽살개의 역사는 오래되었는데 원래 신라시대 귀족들이 기르던 강아지로 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 한국 전통 그림, 민화등에도 자주 등장할 만큼 역사가 깊은 견종 이라고 합니다. 고려나 조선 때 서민적인 개가 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엔 군용 모피 자원으로 이용됐고, 6.25전쟁을 거치면서 수가 급격히 줄어 멸종 단계에 이르렀습니다.다행히 1969년부터 경북 대학교 교수들이 복원 사업을 시작해 1992년 천연기념물 제368호로 지정되어 보존해오고 있습니다. 살개라는 이름 자체가 ‘귀신을 물리치는 개’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액운(살)을 쫓다(삽)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이야기 거리도 많습니다. 우선 고전 문학 ‘숙향전’을 대표 적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해당 작품 속 삽살개는 ‘청삽사리’라는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참고로 구전에 따르면 ‘청삽사리’는 옛날 사람들로부터 ‘사자방’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사자의 새끼’라는 의미지요.그러던 어느 날 청삽살개는 홀연히 숙향의 곁을 떠나게 되는데요. 자신이 없어도 숙향이 남은 생을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으로 판단, 특정 지역에 묻어 달라며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인간과 동물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일부 느껴지는 부분입니다.삽살개가 어떤 이미지로 대중들의 인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지 일부 확인할 수 있기도 하죠.신라 김유신 장군이 군견으로 삽살개를 대동하고 전장에 나섰다는 구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충성심 강하고 영민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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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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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시대의 경제활동에는 어떤 게 있었을까여?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사냥에 대한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작은 종류의 짐승을 더 자주 사냥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러한 작은 짐승의 뼈는 약해 잘 보존되기 어려워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사냥 활동 연구는 주로 사슴·순록·들소·말·첫소·코끼리·산양 등과 같은 큰 젖먹이 짐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옛사람들이 능동적으로 사냥을 시작한 시기는 중기 구석기 시대부터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특히 유럽의 중기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사슴·말·들소·야생 염소를 주로 사냥했습니다. 프랑스의 모런Moran유적처럼 수백 마리의 들소 뼈가 나온 유적이 있는 것으로 보면, 네안데르탈사람들부터 특정한 동물을 사냥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현생인류는 기술 발달과 더불어서 뛰어난 사냥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돌날떼기, 창던지개의 발명, 작살이나 창처럼 획기적인 도구의 제작이 이 시기에 있었지요. 동물을 잡아먹는 식육 경제가 자리를 잡았는데, 이는 사냥감이 되는 짐승들의 습관이나 생태에 대해서 완전히 파악하고 본격적인 사냥을 하였기 때문이다. 후기 구석기시대 약 3만 년 동안 여러 문화가 계속되면서 사람들은 동물 자원의 이용 측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갔다 우리나라의 경우 후기 구석기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사냥감은 사슴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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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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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원래 분단국가 였다가 통일을 했다고 하던데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2차 대전 후 패전 국이였던 독일은 1945년 얄타 회담 예비 협정에서 이루어진 합의에 따라 프랑스, 영국, 미국의 점령 지역은 독일 연방 공화국이 되었고, 옛날 소련의 점령 지역은 동쪽 지역의 일부가 폴란드와 소련으로 흡수된 후, 공산주의 국가인 독일 민주 공화국이 되어 버리고 그래서 동독과 서독으로 나눠지면 우리나라의 38선 처럼 베를린 장벽이 세워 집니다. 1990년 10월3일 동독의 다섯 개 주가 서독으로 편입되면서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통일에 두 방법이 제안되었었는데, 하나는 서독의 헌법인 기본법(Grundgesetz)을 동독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하나는 두 독일의 연방을 구성하여 새로 헌법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동독이 선택한 전자는 더 쉬운 방법이지만 동독이 서독에 ‘합병’된다고 느껴지는 데에 대한 책임이 따랐다고 합니다. 40년 만에 통일이 된 독일 통일에 들어간 비용은 독일의 경제에 큰 짐을 지워 경제 발전을 더디게 했다고 합니다. 통일비용의 재원은 독일 통일 기금과 독일 연대 협약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독일 베를린 대학교의 발표에 의하면 통일에 들어간 비용은 1조 5,000억 유로(1800조원)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주요 원인은 동독의 경제가 서독에 비해 약했으며,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 사이의 환율이 경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여 동독 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렸던 것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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