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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왜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리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진 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일본이 조선을 정벌하고 도자기 기술을 취하고자 했는데 그래서 전쟁을 일으킨 후에 도자기 기술자 즉 도공들을 일본으로 납치해 갑니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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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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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대 후반 '기축옥사'사건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축 옥사는 조선 선조 때 발생한 옥사로, 1589년 10월,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으로부터 시작되어 약 3년간 정여립과 연루된 1,000명의 동인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정여립의 옥사로도 불리우는 이 옥사는 붕당정치가 시작된 초반 과도기에 당쟁에 의해 벌어진 권력투쟁사건의 예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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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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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외교활동을 할 때, 어떤 나라 말로 대화를 했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역관 ( 譯 官 )은 고려 와 조선 시대에 통역 과 번역 업무를 담당하였던 관리를 말한다. 역관은 사대교린, 즉 외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였는데 이들은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위구르어 까지도 전부 다 배워서 의사 소통이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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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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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문관과 무관 중에 어떤 관직을 더 중시했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보통 문관이 무관 보다 더 대접을 받은 것이 사실 입니다. 하지만 문관 이라고해서 무예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문무를 겸비 한 사람을 가장 좋은 관원 이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은 무관 출신 이지만 < 난중일기> 등을 통해서 본 그의 글 솜씨 또한 출중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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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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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놀이동산은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놀이공원은 지금은 없어진 창경원입니다. 1911년 일제에 의해 개장된 창경원은 본래 창경궁이었는데 일제는 조선의 궁궐을 유원지로 만들었습니다. 대한제국의 국권과 황실의 권위를 능멸하는 것이 그 하나 목적이고 다른 하나는 식민지 백성들에게 오락거리를 제공함으로써 환심을 사는 것이 였습니다. 실제로 궁궐을 마음대로 들락날락 하게 된 사람들은 좋아 했지요. 특히 1924년 시작된 밤 벚꽃놀이에는 경성시민의 10%가 다녀갈 만큼 성황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일제 시대에 전차 타고 종로에 와 창경원에 가는 것은 최고의 나들이 코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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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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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장생의 기원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십장생은 열 가지 장생 불사를 표상한 것인데 이에 해당하는 물상은,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 혹은 대나무 입니다. 이런 십장생은 민속 신앙이나 신선 사상에서 유래됐다고 여겨지며, 이 모두가 장수물이므로 자연숭배의 대상입니다. 옛날에는 시문, 그림, 조각 등으로 많이 사용되어왔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종종 모습을 드러내어 고구려 시대때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추정 되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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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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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감각을 키우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모네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조롱, 멸시, 비아냥을 이겨냈다고 하지요. 모네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삶으로 보여주었는데 ‘삶’으로 보여주는 자세만큼 가장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가장 잘 맞는 형태의 플랫폼을 찾아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됩니다. 그게 자신의 감각을 전하는 전략이라면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에게 맞추고자 하면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는 듣기 좋은 말에 귀 기울 수밖에 없으니까 만일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것을 ‘변화’에 맞추어 일관성 있게 전하면 됩니다. 다만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하는 일은 끈기를 필요로 할 뿐입니다. 그 끈기에 꾸준히 세밀함을 더하면 되는데 모네가 한건 그뿐 입니다. 그는 빛을 관찰하고 또 관찰했을 뿐입니다. 예술 감각은 타고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렇듯 남의 시선을 너무 신경 안쓰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계속 관찰하고 느끼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넓혀 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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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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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마다 동일한 언어와 글을 사용했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선 삼국간에는 의사 소통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 여러 사신을 보내서 협상을 하게 된 부분에서 기록이 보여 집니다. 예를 들어, 내물왕 18년 ‘백제왕이 글을 보내 말하기를[百濟王移書曰]’, ‘우리 왕이 ‘대답해 말하기를[答曰]’, 눌지왕 34년 ‘고구려 사자가 와서 말로 통고하기를[使來告曰]’, 고구려 장수왕 12년 신라의 사신을 ‘왕이 특별히 두텁게 위로했다.[王勞慰之特厚]’, 백제 개로왕 21년 고구려 승려 도림이 ‘문 앞에서 고하기를[詣王門告曰]’, ‘왕을 모시고 앉아 조용히 말하기를[從容曰]’ 등은 표현 방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이상의 기록들을 보면 삼국 간에 어느 정도 의사 표현이 자유스러웠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그리고 글은 전부 다 한자어로 기록 되었기에 문자는 다 동일 했을 것으로 추정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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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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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사람들은 혹서기를 어떻게 지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요즘은 거의 볼수 없는 풍경 이지만 불과 40-50년 전만 해도 농촌에서는 저녁에 대청 마루에 앉아서 수박이나 참외, 옥수수 등을 먹으며 식구들 끼리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자주 볼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수박과 참외등의 과일이 그렇게 비싸지도 않았습니다. 또 만일 돈이 없으면 동네 과수원등에서 수박 서리 라고 해서 수박등을 몰래 가져와서 먹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바닷가를 갈수 있는 형편은 못 배도 나른대로 낭만적인 여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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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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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음악관 차이점은 뭐죠?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모차르트는 곡의 구조나 음표들의 정당성보다는 자신의 환타지나 감정에 충실한 작곡가인 반면 베토벤은 떠오르는 악상에 충실했다기보다는 작곡을 하기에 앞서 구조나 논리를 먼저 생각하고 그 안에서 음들 사이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음악적인 결과에 많은 관심을 가진 작곡가 입니다. 즉 베토벤은 그림으로 따지면 현실주의, 사질주의 라고 한다면 모짜르트는 초 현실주의에 해당하는 화풍이라고 비유 하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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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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