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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엑스포 시민운동은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2010년에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2012여수세계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선진 시민문화를 구현하기 위해 벌인 시민운동이 바로 엑스포 시민 운동 입니다. 대전엑스포 시민운동은 여수 시민들의 참여의식과 지역을 사랑하는 선진문화 의식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또한 기관·단체·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전 시민이 하나로 뭉치는 단결력과 화합의 전기를 마련하였다고 뿐만 아니라 한층 성숙한 시민의식 함양은 물론, 환경의 중요성을 재 인식하는 계기도 되었다고 합니다. 여수시는 매월 12일을 ‘엑스포 시민운동 청결의 날’로 지정하여 기관·단체별로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 속에 깨끗하고 아름다운 여수 가꾸기에 솔선수범하였다고 합니다. 자투리땅 꽃밭 가꾸기, 공한지와 가로변의 화단 조성 등의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학문 /
역사
2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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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 달러 시스템이 붕괴시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도 없어지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경제·금융전문가입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중국의 위앤화는 기축 통화로서의 가치를 전혀 인정 받지 못했습니다. 다른 국가에서 그 가치를 인정 해주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상황이 점점 변하고 있는 것은 사실 입니다. 그리고 더욱 더 주목 해야 할 것은 기축 통화의 국가 별 기간 입니다. 미국 달러화 이전에는 프랑스의 프랑과 영국의 파운드가 국제 기축 통화 역할을 해왔습니다. 프랑스의 프랑은 1720-1815년 까지 약 95년간 , 그리고 영국의 파운드는 1815-1920년까지 약 105년간, 그리고 미국의 달러화는 1921년 부터 현재 까지 약 100년이 넘게 기축 통화 역할을 해 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미국 달러가 다른 국제 화폐에게 그 자리를 내주어 야할 시점이 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태까지 단 한번도 공산주의 체체의 화폐가 기축 통화가 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달러 다음 바튼을 중국의 위앤화가 받을 것인지는 사실 약간 의문시 됩니다.
경제 /
주식·가상화폐
2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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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럴림픽을 출전할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패럴림픽 선수 출전 기준은 1980년대부터 기능적 분류 시스템은 장애 선수 분류의 기준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능적 분류는 선수들의 장애가 그들의 선수 활동 운동 성과에 미치는 영향에 중점을 둔다고 합니다. 선수들이 다리 기능의 손실 원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같은 기능의 장애를 가진 것이 중요하기 때문인데 기능적 분류의 유일한 예외는 국제 맹인 스포츠 협회 (International Blind Sport Federation, IBSFO)에서 사용하는 분류 형식으로 이는 여전히 의학적 시스템에 기반을 둔다고 합니다. 몇몇의 종목들은 오직 특정한 장애 유형에만 부합될 수 있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골볼은 오직 시각 장애 선수들만이 참여할 수 있다고 합니다. 패럴림픽은 세 단계의 시각장애를 인정하는데, 결과적으로는 골볼에 참여하는 모든 선수들은 검정 안대를 착용해야만 하며 이는 약간의 시각 장애를 가진 선수들이 이점을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육상과 같은 다른 종목들은 다양한 장애를 가진 선수들이 참여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육상에 참여하는 선수들은 분류의 한 범위에 속해지며, 그 분류는 그들의 장애 상태에 따라서 나뉜다. 예를 들면, 11-13 클래스는 시각 장애 선수들을 위한 클래스이며 이는 그들의 시각 장애 정도에 따라 분류되며 또한 휠체어 럭비 와 같은 단체 경기도 있는데 팀 멤버들은 그들의 활동 제한에 따라 포지션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낮은 점수는 높은 점수 보다 좀 더 심각한 활동 제한을 의미합니다. 한 팀은 시합 중 전체 점수가 특정점수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이는 동등한 경쟁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면, 휠체어 럭비에서 5명의 선수들의 총 장애 점수가 8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학문 /
미술
2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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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은 왜 김삿갓이란 이름으로 유명해졌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의 본명은 김병연인데 비록 김병연은 과거에서 장원을 했지만 할아버지가 임신년(1812) 관서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반란 때 항복했으므로 사형당했고 그 집안은 폐족이 됐다고 합니다. 김병연은 스스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하며,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다고 하여 일찍이 삿갓을 쓰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삿갓으로 불리게 된 것 입니다.
학문 /
역사
2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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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서진이네 방송보는데 이해가안되는점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칸쿤이나 리비에라 마야 등의 멕시코 대표적인 휴양지 등에서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당히 많이 유치하고 있기 때문에 영어가 무리 없이 소통 됩니다. 따라서 한국인 관광객 분들 중 스페인어를 하나도 모르시는 분들도 멕시코 휴양지는 부담 없이 여행합니다. 그 외 멕시코시티, 과달라하라, 과나후아토 등 관광산업이 발달되어 있는 곳은 영어를 사용하실 수도 있지만 그들이 가장 많이 쓰는 스페인어를 하면 가장 좋겠지요.
학문 /
음악
2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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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중국드라마는 중국 영화에 비해서 그래픽 기술이 뒤떨어지게 제작할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의 국영 방송 CCTV급의 대형방송사나 TVB처럼 오래 전부터 드라마를 제작해 온 방송사가 아니면 보통 드라마 제작사에게 방영권을 구매한 다음에 드라마를 방영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작단가가 맞지 않다거나 드라마 내용이 별로 이거나 아니면 시청률 올리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 내려질 경우에 기껏 제작된 드라마는 말 그대로 그냥 버려진 다는 것 입니다. 거기에 국가에서 드라마 같은 경우는 아직도 공산당 검열을 거친다고 합니다. 그러니 제작 수준이 점점 더 낮아 질수 밖에 없지요.
학문 /
미술
2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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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인 이완용은 '매국노' 맞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완용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앞장서면서 을사오적의 우두머리로 비난을 받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완용이 처음부터 그가 친일파 매국노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른 개화파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나라가 근대화되어 부강해지기를 바란 사람이었는데요. 개화파가 된 이완용은 미국 공사가 되어 미국에서 발달된 산업과 문물을 접하고 고국도 하루 빨리 근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귀국한 뒤 독립 협회에 참가하여 개화파와 함께 열심히 활동합니다. 당시 정세는 일본에 유리하게 흘러갔고 마침내 일본이 을사조약을 들이밀었고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일본의 비위를 맞추어 가며 우리의 이익을 도모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을사조약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덕분에 총리 대신이 된 그는 한일합병조약에도 발 벗고 나섰습니다. 일본은 그의 공을 높이 기려 백작이라는 귀족 지위와 중추원 고문이라는 높은 직책까지 주며 후하게 대접했지요. 우리나라가 일본의 통치를 받으면서 근대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사실 이완용은 오로지 자기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친일파 노릇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하는 일이 나라를 근대화시키기 위한 최선 혹은 차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늘 권력이 있는 쪽에 서서 일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진짜 잘못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이완용의 사례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바로, 나라를 위한 일은 현재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지 반드시 권력을 쥐어야 가능하다는 생각은 잘못된 관념이라는 생각 인 것 같습니다.
학문 /
역사
2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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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은 천민출신인데 어떻게 김해김씨가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만덕은 김해 김씨 좌정승공파 15세손이 맞습니다. 제주에 귀향온 선조 김만희(金萬希)가 조선 개국에 협력하지 않아 제주로 유배를 와 스스로 "고려 유민" 칭하며 제주 삼절신(三節臣) 불리며 이곳 제주 곽지리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그의 6세손 절충장군을 지낸 김후찬(金厚瓚)은 김만덕의 선조라고 합니다. 아마도 그녀의 신분의 변화를 보면 원래 양반-천민-다시 양인 이 되는 과정을 겪은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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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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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멸망 후 당나라에 끌려가서 어떤 대우를 받으며 생을 마감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에서 최근에 발견된 백제의 왕족의 무덤이 바로 부여태비 입니다. 부여태비의 아버지 부여덕장. 부여덕장의 아버지는 부여융. 부여융한테는 2명 내지 3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 후손들이 당나라에서 일정한 입지를 가지고 존속해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부여태비의 자매가 있었는데 태비는 다섯 아들을 두었다고 합니다. 다섯 아들은 또 몇몇의 아들을 두었는데요 부여씨. 백제왕족이 당나라에서 활동을 이어나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부여태비의 삶은 먼 타국에서도 정체성을 가지고 왕비의 자리까지 올라간 왕족이라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다만, 당나라에서도 백제는 이미 없어 졌기에 그냥 당나라인 신분으로 살아 갈 수 밖에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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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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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이 패망했을 때 일본에 있었던 조선의 왕족들은 고국에 어떻게 돌아왔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영친왕 입니다. 1907년 12월 5일, 이토 히로부미, 영친왕을 일본으로 끌고 가는데 영친왕은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입니다.당시 불과 10세였던 영친왕은 부모인 고종황제와 엄황귀비 품을 떠나 인천항을 출발한 지 열흘 만에 일본에 도착했습니다.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갔지만 사실상 인질로 잡혀간 것이었지요. 일본에 거주하며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은 영친왕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거쳐 육군 중장(군대 계급의 하나)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조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귀국을 거부했습니다. 이후 줄곧 한국인의 신분으로 일본에서 지내야 했던 영친왕은 1963년이 되어서야 박정희 정부에 의해 입국이 허락되어 꿈에 그리던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영친왕은 귀국 당시 뇌혈전증(뇌에 혈액공급이 차단돼 나타나는 증상)으로 실어증(언어를 이해하거나 구사하는 능력에 장애가 발생하는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약 7년간의 투병 끝에 73세의 일기로 1970년 한 많았던 생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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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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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
1847
1848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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