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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심지 말아야 될 나무는 어떤것이 있는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표적인 나무는 바로 복숭아 나무 입니다. 복숭아는 신선이 먹는 과일이고 신령스러운 나무여서 요사스러운 기운을 쫓아내고 잡스러운 귀신을 몰아내는 힘이 있는 나무 입니다. 복숭아는 귀신을 쫓기 때문에 제사상에도 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복숭아나무를 심으면 조상신이 제삿날 무서워서 집에 오지 않는다고 한다는 말 떄문에 복숭아 나무는 심지 않는다고 하네요. 또 다른 나무가 바로 동백 나무 인데여. 아름다운 동백나무는 꽃잎이 떨어질 때 꽃 전체가 한 번에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역모죄로 목이 떨어지는 모습이라 아마도 우리 양반네들은 한 번 역모죄를 뒤집어쓰면 자손 대대로 조정에 출사를 할 수 없었던 양반들에겐 몸서리쳐지는 꽃이었을 것입니다.
학문 /
음악
23.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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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이중성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간디는 신분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비판을 받는것은 사실 입니다. 힌두교리에서 파생된 인도의 사회 계급은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아(왕족과 무사)’ ‘바이샤(평민)’ ‘수드라(노예)’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보다 더 아래에는 달리트(불가촉천민)라는 계급이 존재합니다. 당시 간디는 주변 사람들에게 달리트와의 결혼을 권장하면서 인도 사회의 달리트 차별에 맞서는 위인다운 모습을 보였다고 하지요. 하지만 자신의 아들이 신분이 낮은 이슬람교 여성과 결혼하려고 하자 완강히 반대하며 대외적인 태도와는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고 합니다. 평소 인간 평등을 중요시 하는 간디에게는 이중적인 행동 이지요. 하지만 역사적으로 한 인물을 이분법에 의해서만 판단 하는 것은 굉장히 판단 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체로서 불완전한 존재이고 그 사람의 양면성을 파고 들면 신을 제외하고는 역사상 누구도 위대한 인물은 없으니까요.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자기 와이프 에게는 소심하고 능력 없는 남편에 불과 했고, 위대한 테레사 수녀는 자신이 운영하는 극빈자 보호시설을 개선하는 데 의지가 없었고 열악한 운영을 고집했다고 합니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과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이라 믿었다고 합니다. 세계 각지의 후원과 구호물품 등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현대화된 의료 장비를 갖추는 것을 거부해서 오히려 많은 이들이 죽어 갔다고 합니다. 역사적인 사건 혹은 인물을 평가 할 때 이중성이 보이는 것은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이기에 오히려 당연한 것이며 그 것을 어떤 시각으로 보면서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면을 비교 해서 보면서 양분법이 아닌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는 유연한 평가 자세가 역사에 대한 혹은 인물 평가에 대한 올바른 시각 일 것 같습니다.
학문 /
역사
23.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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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은 왜 프랑스, 독일이 아니라 영국에서 먼저 일어난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단순 과학 수준으로 따지면 프랑스가 영국보다 더 발달 했지만 영국이 먼저 재산권을 인정 해 줬기 때문 입니다. 영국의 기계공이 과학자들보다 앞서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산업현장에서 기술 혁신에 대한 필요성을 그들 자신이 가장 절실히 느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한 체험으로 기존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영국에서는 재산권이 보호되었다는 데 있다고 합니다. 명예혁명 이후 영국에서는 사법 체계가 확립됨으로써 재산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되기 시작했는데, 이에 따라 산업 재산권인 특허권이 보장되면서 기술 혁신이 더욱 촉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영국의 특허 취득 건수가 18세기 중반 이후 극적으로 증가했다는 점이 이런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자유방임주의를 표방해 각종 세금이 철폐되고, 보호무역이 쇠퇴해 대내외적으로 시장이 확대되었다고 합니다. 이로써 경제 활동은 더욱 촉진되고 기업들의 경쟁적인 투자가 활발히 이뤄져 기술 혁신이 생산에 도입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생산성을 증대시킨 기업은 이윤을 얻어 저축과 투자를 지속할 수 있었고, 산업을 계속적으로 발전시키며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학문 /
역사
2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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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우리나라 수능과 같은 시험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현재의 수능이 있다면 조선 시대에는 과거 시험 제도가 있었지요. 과거시험이 처음 시작된 것은 중국의 수나라때인 것으로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에는 고려의 4대 왕인 광종때 처음 실시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인 통일신라 원성왕때 독서삼품과라는 시험이 있긴 했지만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거나 채용하는데 참고하는정도로만 사용됐기 때문에 본격적인 과거시험은 958년에 처음 시작되었고 그것이 조선 시대에 까지 계속해서 이어져왔습니다.
학문 /
역사
2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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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오는 왜 포루투갈의 식민지였었던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포르투갈이 마카오의 행정권을 중국인 관리에서 탈취하여 이곳을 완전 식민지화한 것은 1849년의 일로, 아편 전쟁에서 영국이 홍콩 식민지를 획득한 것에 자극을 받은 것이 이유 입니다. 포르투칼 식민 통치를 받아오던 마카오는 1999년 12월 20일 442년 만에 중국에 반환되었다고 합니다. 이로써 명 말 이래 계속되어 온 포르투갈의 마카오 식민 통치는 종식되었습니다.
학문 /
역사
2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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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는 원래 법관였다가 화가로 결심한 이유는 먼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색채의 마술사’로 불렸던 마티스는 1869년 프랑스 북부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뜻에 따라 법률가가 됐지만 급성 맹장염으로 2년간 병석에 누워 있다 뒤늦게 그림을 접하며 미술로 전향한다고 합니다. 그만의 뛰어난 색채 감각으로 당대 피카소와 맞먹는 대가가 됐다고 합니다. ‘빛으로 노래하고 색으로 춤추다’란 부제가 붙은 미국 여성 작가 마저리 블레인 파커의 <앙리 마티스>는 아이에게 들려주듯 다정다감한 이야기로 풀어낸 대화가 입니다.
학문 /
미술
2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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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은 한국에서 통장 개설이 가능한지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경제·금융 전문가입니다. 외국인도 한국에서 통장 개설 가능 하고 카드도 발급 가능 합니다. 국내에서 체류 중인 신분증( 외국인 거주 등록증, 혹은 체류증) 만 가지고 은행에 가서 발급 받으면 됩니다.
경제 /
예금·적금
2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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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세일이라는게 정확히 어떤걸 의미하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경제·금융 전문가입니다. 한마디로 판매 물량을 꾸러미로 싸서 판맴 한다는 의미 인데여. 가격과 물량을 미리 정해 놓고 특정 주체에게 일정 지분을 묶어 장이 끝난 이후 일괄 매각하는 기법을 말한다고 합니다. '블록 딜(Block Deal)' 이라고 하며 우리말로는 '일괄매각'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경제 /
경제용어
2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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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위안화의 거래로 인해 달러의 몰락 가능성이 높을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경제·금융 전문가입니다. 위앤화는 절대 달라처럼 기축 통화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위안화는 통화의 '가치기준'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달러와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현재 달러화는 석유, 천연가스와 같은 자원의 가격을 매기는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고 대부분의 정부들이 통화안정 정책을 펼 때 참조하는 통화입니다. 하지만 위안화는 여기 해당되지 않습니다. 또한가지 이유는 통화의 '가치저장' 수단으로서의 역할입니다. 기축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들이 외화준비금으로서 안심하고 보유·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위험도가 낮은 안전 자산으로서 유사시 신속하고 낮은 비용으로 현금화가 가능해야 합니다. 하지만 위안화는 이 조건 역시 충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무엇보다 큰 원인은 중국 당국의 정책에 따른 한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개방 이후 시장경제를 도입한 지 40년이 훌쩍 넘게 지났다고 해도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자본유출 우려로 결코 자본이 자유롭게 거래되도록 하지 않습니다. 부동산은 완전한 소유가 불가능하고 당국의 자의에 의한 규제 등 정치적 리스크가 크다 보니 중국의 부유층은 물론 중산층조차 투자 여력이 생기면 해외로 자산을 옮겨 보전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결론적으로 위앤화가 세계의 기축 통화가 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경제 /
주식·가상화폐
2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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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서 북한이 먼저 남한을 침략한 증거가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북한의 남침 증거들은 여러 가지 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북한군 내의 작전 명령서 입니다. 바로 북한의 정찰명령 제 1호 입니다. 1950년 6월 18일 북한군 각 사단에 하달된 것으로 정면의 한국군 상황, 공격개시 전후 단계별로 수집해야 할 정보요구 사항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원본은 러시아어로 되어 있으며 1950년 10월 4일 서울에서 노획되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증거가 북한군 제4단, 제2사단의 전투명령 제 1호 입니다. 이 명령서에 의하면 1950년 6월 22일 하달한 각 사단의 전투명령은 한글로 되어 있으며, 1950년 6월 23일까지 공격준비를 완료하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상과 같은 6.25는 분명한 남침이 맞습니다. 북한의 북침 주장은 터무니 없다고 보여 집니다.
학문 /
역사
2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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