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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적 누드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 대해 마크트웨인이 한 말이 뭔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38년 그려진 파격적 누드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 대해 마크 트웨인은 이 작품을 "세상에서 가장 저속하고, 가장 사악하고, 가장 음란한 그림"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관람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저 시선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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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4.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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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의 외교 정책과 대외 관계는 어떠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조는 청나라의 건륭제의 경사에 빈틈없이 사신을 파견하였고, 양국 간의 관계는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단계로 발전하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조선의 대청 외교는 국익을 우선시하며 상호간에 우호적인 관계를 중시하였던 사이 였습니다.
학문 /
역사
24.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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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3대 시가인 윤선도의 시조 특징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윤선도의 시조들의 특징은 보통 연시조 형태가 많고 성격은 자연친화적, 탈속적이고 주제는 보통 자연 속에서 노니는 삶의 즐거움과 임금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이 많으며 대조적 시어를 통해 화자가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고자 했으며 설의법을 사용하여 자연에서 사는 삶의 즐거움을 강조함이 특색이고 세속적인 것과 자연을 대비시켜 주제를 부각하며 한문투보다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리면서 안분지족하는 삶의 자세와 물아일체의 자연친화적 태도가 잘 드러남이 특색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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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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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이름이 대한민국으로 지어진 이유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한민국은 '삼한을 통일한 큰 한으로서 백성의 (백성이 주인인) 나라를 가리킨다라고 합니다. "한이 우리나라를 가리킨다는 것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전부터 일본에서는 정한론 (征韓論)이 제기됐고, 조선시대에도 명․청 (明淸) 외교문서에서 조선을 한 (韓)으로 부른 사례가 많이 나오는데 민국은 조선왕조실록, 특히 영․정조 실록에 많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우리나라의 공식 명칭을 조선인민 민주주의 공화국 이라고 표기 하고 있습니다.
학문 /
역사
24.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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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이 대규모의 구조조정에 들어갔다는데 이는 우리나라경제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경제·금융전문가입니다. 미국 빅테크 기업이 연이어 대규모 인력 감원 계획을 밝혔다고 합니다. 코로나19 이후 급성장했던 정보기술(IT) 기업의 호황이 끝나며 침체에 들어선 결과라고 합니다. 이러한 감원 계획은 우리 나라 경제에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줄것으로 예상 된다고 합니다.
경제 /
경제동향
24.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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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영은 왜 창씨개명을 반대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윤덕영은 1925년에는 조선 총독부 중추원 고문, 1940년 사망 직전에는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 조선공로자 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고 합니다.이미 1939녀에 창씨 개명을 해놓고 해평 윤씨 무종 종친회가 열렸을 때 강력하게 창씨 개명을 반대했다고 하는데 윤치호에 의하면 그의 자존심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라 했다고 합니다.
학문 /
역사
24.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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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향교는 어떠한 기능을 하였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향교는 성현을 배향하는 문묘와 학생들이 공부하는 강학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명륜당은 교생들이 강학하는 곳입니다. 조선의 향교는 고려와는 달리 반드시 문묘를 교육 공간과 분리하여 설치함으로써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에 대한 배향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또한, 향교를 중심으로 향사례 (鄕射禮)를 비롯한 여러 가지 유교 행사를 실시함으로써 직·간접적으로 유교 이념을 보급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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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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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실종 미제 사건인 개구리소년 사건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91년 3월 26일에 대구직할시 달서구에 살던 다섯 명의 국민학교 학생이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선 뒤 실종된 사건을 말하는데 5명의 초등학교 학생이 그것도 같은 날 동시에 실종된 이 사건은 당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고, 사건 발생 2년 후인 1993년에는 KBS 1TV의 사건25시 와 SBS 의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심층적으로 방영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특히 공중전화 카드, 엽서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어린이 만화 비디오테이프 등까지 대대적으로 캠페인이 전개되면서 남녀노소 대부분이 이 사건에 대해 인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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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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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세자책봉을 할 때 어떠한 기준으로 세자를 책봉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 세자 책봉의 원칙은 적장자 세습이 원칙인 조선시대에 왕비 소생의 장자가 세자로 책봉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실제로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왕은 7명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적장자로서 세자로 책봉은 되었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세자가 7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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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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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명한 카네기는 어떠한 업적이 있나요 그리고 카네기는 왜 자선사업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앤드루 카네기는 1835년 스코틀랜드에서 가난한 직물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카네기 가족은 1848년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이들은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어린 앤드루는 집안이 가난해 학교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명석했고 열심히 일하는 소년이었습니다.앤드루는 섬유공장에서 일주일에 1달러 20센트를 받고 새벽부터 밤까지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이어 전보 배달원이 돼서 마을 곳곳을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모르스 코드를 배워 시간만 나면 연습을 했습니다. 그런 노력으로 앤드루는 16살 때 전보 기사가 됐습니다. 기술자가 된 앤드루는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 전보 기사로 취직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앤드루는 열심히 책을 읽어 지식을 넓혀 갔습니다. 책은 주로 동네의 사설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습니다. 그때의 독서는 앤드루 카네기 일생의 지적 바탕이 됐습니다. 앤드루는 책을 빌려준 당시 도서관의 고마움을 늘 잊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부자가 돼서 엄청난 수의 공공 도서관을 짓도록 한 건 그러한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18살 때는 펜실베이니아 철도의 서부 지역 감독의 비서가 되고 차츰 승진해 피츠버그 지역 철도 감독이 됐습니다. 카네기는 1870년대부터 미국 산업계에 일기 시작한 기업 합병 붐을 타고 석탄, 철광석, 철도, 선박업 등을 계열화하는 대그룹을 형성했습니다. 1892년에 설립된 카네기 철강회사(Carnegie Steel Company)는 당시 세계 최대의 철강 트러스트로, 미국 철강 생산의 4분의 1 이상을 생산했습니다. 카네기는 무자비한 파업 저지, 노조 강제 해산 등으로 비난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1900년 카네기 철강의 생산량은 10배가 넘게 증가했고, 매출은 20배 이상 올랐습니다. 1901년 카네기는 자신의 철강회사를 JP모건(JP Morgan)에 약 5억 달러에 매각했습니다. 철강회사를 매각하고 돈을 따져보니 카네기는 미국 최고의 재산가였습니다. 이때 카네기의 나이는 66세. 카네기는 실업계에서 은퇴하고 본격적인 자선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앞부분은 돈을 모으는 시기, 뒷부분은 남을 위해 쓰는 시기라고 생각해 온 카네기에게 이제 ‘부를 나누는 시기’가 된 것입니다. 카네기의 자선 활동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2천500개가 넘는 공공도서관 건립이었습니다. 그 중 1천700개 가까이는 미국에, 나머지는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세워졌습니다. 카네기에게는 도서관의 ‘수호성인’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카네기는 교육 분야에 가장 많이 투자했습니다. 피츠버그에는 카네기멜런 대학을 건설했습니다. 미국 대학의 연구 지원을 위한 워싱턴의 카네기 인스티튜트, 학문적 연구 활동을 지원하는 카네기 재단도 설립했습니다. 대학교수들의 노후를 도와주기 위한 카네기 교육진흥재단도 세웠습니다. 그는 또 각종 문화예술 분야에 거액을 돈을 쾌척했습니다. 카네기홀, 카네기 박물관, 뉴욕의 카네기코퍼레이션 등이 모두 그가 만든 단체들입니다. 그는 죽을 떄 재산을 가지고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 했고 사회에 환원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카네기는 1919년 8월 11일 매사추세츠주 레녹스에서 84세로 숨을 거뒀습니다. 직접적인 사인은 폐렴이었습니다. 뉴욕주 슬리피할로우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들을 주위에 모으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 여기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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