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예술치료의 효과는 어느정도일까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예술 치료(영어: arts therapy)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과 현대 의학, 심리 치료 이론, 상담 이론이 통합된 다각적인 치료기법이다. 창조적인 예술 활동을 통해 내담자의 감정이나 내면세계를 자발적으로 표현하게 하고, 사고나 감정, 행동의 제한점을 개선 및 유지시키는 것에 활용되고 있다.예술 치료는 예술의 장르가 다양하고 치료의 개념이 치유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어 다양한 유형으로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미국 미술치료협회(영어: American Art Therapy Association)는 예술 치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미술 치료(영어: Art therapy)란 전문적 관계 내에서 병, 트라우마 또는 삶에서의 도전들에 직면한 사람들이나 개인적 성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예술 작업이 치료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말한다.[1]캐나다 음악치료협회(영어: Canadian Association for Music Therapy)의 음악 치료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음악치료(영어: Music therapy)란 개인의 신체적, 심리적, 정서적 통합을 돕고 병과 결함을 치료하는데 음악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2]공통적으로 예술치료는 정신질환, 자폐증 등 구체적인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 외에도 일반인 각자의 인격 성장과 발전, 자아 통찰력의 증진 등 자아성찰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Q. 신숭겸 장군의 성장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숭겸의 활솜씨가 뛰어났는지 함께 황해도 평산으로 사냥을 나간 왕건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가리키며 "저 기러기 떼 중 앞에서 세 번째로 가는 기러기를 맞춰 보라."라고 명하자 화살을 쏴서 기러기를 떨어뜨렸다는 일화가 남아 있는데 이 이야기가 평산 신씨의 본관이 평산이 되는 유래이다.신숭겸 이전에는 성씨가 없었고 출신은 미천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신라 중앙의 왕족, 귀족층이나 장보고처럼 중국물 먹은 사람이 아니면 지방 명문가 출신들도 성씨가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비록 후백제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찬이었던 능환조차 성에 대한 기록이 없다.[3] 그 외에도 정2품 대광이었던 만세나 매곡성주 공직 등 고위층이나 유력가이면서도 성씨가 전해지지 않는 사례는 많다. 고려사 태조 시기를 살펴보면 성씨가 없는 관료나 호족들이 수도 없이 등장하는데 동일 시기에 성씨가 전해지는 박지윤, 유천궁 같은 유력 호족들 역시 당대에 자칭하고 세보를 꾸몄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수많은 성씨들의 시조가 후삼국시대 호족이다.고려 개국에 기여한 무장들 중에서는 일찍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왕건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전했던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의 견훤에게 참패하고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신숭겸은 한고제 유방을 살리기 위해 미끼가 되어 죽은 기신을 본따 자신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을 빌려 입고 미끼가 되어 후백제군을 유인했으며, 왕건은 일반 군졸의 옷을 입고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신숭겸의 희생 덕분에 왕건은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후백제군은 신숭겸이 왕건인줄 알고 쫓았고 결국 신숭겸은 전사했으며 함께 유인 작전에 나선 김락, 김철, 전이갑·전의갑 형제와 그 사촌동생인 전락, 개국공신 평장사 호원보, 대상 손행을 포함한 8명의 장수가 전사했다. 이 때 4명을 포함하여 모두 8명의 장수가 전사하였다 하여 공산의 이름이 팔공산이 되었다 한다.훗날 참수된 신숭겸의 시신은 왼쪽 발 밑에 북두칠성 모양의 사마귀가 있다는 것을 근거로 겨우 찾았지만 머리는 끝내 찾지 못해서 왕건은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고, 미리 정해둔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에 매장해주었다. 신숭겸의 무덤은 봉분이 3개인데 머리를 대신한 황금 두상을 지키고자 이렇게 했다고 전한다. 이 묘자리는 풍수지리가들이 명당 중에 명당이라고 극찬하기도 한다. 가보면 석물 같은 게 없을 뿐이지 영락없는 왕릉의 모양새를 하고 있으며 맑은 날씨에 묘로 올라가보면 춘천시내가 훤히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