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고려시대 무신정변의 원인과 정변이후 고려의 정세는 어땠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무신의 난은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천대하던 문벌 귀족 시대의 문제점이 쌓인 끝에 터져 나온, 예고된 정변이었다. 고려는 976년(경종 1년) 전시과를 실시하면서 관리들을 양반(동반과 서반)으로 분류했다. 995년(성종 14년)부터 동반은 문신, 서반은 무신으로 삼고 동반은 종1품 문하시중, 서반은 정3품 상장군을 가장 높은 벼슬로 정했다. 이처럼 무신이 문신보다 서열이 낮다 보니 전쟁이 나면 벼슬이 더 높은 문신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귀주대첩을 이끈 강감찬(거란 3차 침략 감행 참조), 9성을 쌓은 윤관(윤관, 9성 축조 참조)은 모두 문신이었다.무신에 대한 천대는 고려 사회가 안정돼 가면서 문벌 귀족의 향락 풍조가 심해질수록 더욱 심해졌다. 인종 때는 문벌 귀족의 최고 권력자인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나례희 때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 정중부가 화를 내자, 도리어 김부식이 인종에게 요청해 정중부를 벌한 일도 있었다. 이 같은 사례가 계속되자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의 불만이 커 갔다.예종과 문신들이 보현원으로 행차하던 중에는 나이 든 대장군 이소응이 젊은 문신과 오방수박희를 겨루다 패한 일이 있었다. 이때 젊은 문신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때려 무신들의 분노를 샀다. 무신들에게 원한을 산 김돈중과 한뢰는 모두 이번 정변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Q. 우리나라 족보의 시작은 언제부터 시작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족보를 '보첩(譜牒)'이라고도 한다. 한 가문의 계통과 혈연관계를 알기 쉽게 (대부분)부계 중심으로 정리한 도표 형식의 책으로, 가문의 단합과 조상에 대한 공경이라는 유교적인 가족관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그 시초는 중국으로, 제왕연표(帝王年表)라는 황족의 혈통 계보 책에서 비롯되었다. 개인이 족보를 가지게 된 것은 한나라 때 현량과 제도를 통한 인재 선발에서 응시생의 가족 내력을 확인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한반도에 족보가 처음으로 건너온 것은 1562년(명종 17)의 문화유보(文化柳譜)라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1472년(성종 7) 간행된 안동 권씨의 "성화보"(成化譜)이다. 굳이 조선시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의 문벌귀족들도 족보와 유사한 혈통 증명 체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안동 권씨 성화보의 제작 과정에서 권제-권람-서거정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자료 수집 및 제작 기간이 소요되었고, 그 서문에서 '우리나라는 이전에는 종법도 보첩도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의 혈통 기록 방식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새로운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