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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기태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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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전문가
보성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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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도의 사티제도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시바의 첫 부인 삭티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으나 아버지가 남편 시바의 명예를 모독한 것에 분노한 나머지 희생제에 몸을 던져 희생했다는 이야기에서 악습이 유래했다는 설입니다. 사티(Sati)는 남편이 죽으면 시체를 화장할 때 아내가 불 속에 뛰어들어 남편의 시체와 함께 불타는 풍습입니다. 사티는 정숙한 아내라는 어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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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 노덕술을 두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노덕술은 악질적인 일제부역자로 일제강점기에 당시 창씨개명한 이름은 마쓰우라 히로였습니다. 좌우를 불문하고 친일부역자임을 공인하고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고 약산 김원봉을 북으로 가게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1920년에 경남 순사교습소를 졸업하고 경찰 근무를 시작하고 1921년에 순사부장 1924년 경부보 1932년 경부 1943년 경시 1944년 수송보안과장까지 승진합니다. 조선인으로서는 초고속 승진으로 경감 총경까지는 간 셈입니다. 어찌나 악랄했던지 민중들 사이에 친일고문경찰=노덕술로 불리워졌습니다. 해방 이후 평양경찰서장을 맡고 있던 노덕술은 공산주의 세력에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1945년 말에 탈옥 후 월남합니다. 다음 해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됩니다. 노덕술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당한 것도 있고 정권에 아부하기 위해 그 비루한 명줄 한번 늘리겠다고 경찰 내 반이승만 세력을 축출하고 좌익분자 검거에 주력합니다. 반민특위 간부 암살미수와 친일행위로 지명수배 당한 상태에서도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니는 등 권력을 등에 업고 못할 것이 없습니다.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체포되자 이승만은 단순한 기술자라고 그의 석방을 종용하여 김상덕 반민특위원장에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게 안먹히자 이승만은 반민특위 활동을 중지시키고 특위활동을 방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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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려시대 무신 양규는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 무신으로 거란 성종의 40만 대군에게 홍화진에서 포위되자 완강히 저항하다 무로대 이수 석령 여리참 등에서 기습하여 7전7승에 약 7000명을 사살하고 잡혀가는 백성 1만여명을 구하였습니다. 이어 애전에서 적을 기습하여 1000여명을 베었으나 대군의 공격을 받아 김숙홍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삼한후벽상공신에 추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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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이 되면서 고려의 왕족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은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등을 유배보내고 정몽주를 따르던 최측근 8명은 곤장 100대를 때려 사망케 합니다. 고려 왕씨 왕족들은 거제도와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1393년 이성계는 공양왕 동생을 불러 자신은 왕씨들을 해칠 마음이 없다며 육지에 살게 합니다. 그러나 경남에서 김가행 박중질 등이 왕화 왕거와 접촉하여 고려 왕실 복원운동을 꾀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1인자가 못하면 2인자가 나서듯이 정도전이 나서서 다시 왕씨들을 거제도와 강화도로 유배를 보냅니다. 공양왕과 자식들은 유배를 가는 도중에 후송을 맡은 중추원 부사 정남진의 손에 삼척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강화도로 유배가던 왕씨들 모두는 김포에서 강화도로 가는 강화나루에서 수장당합니다. 1394년 4월 20일 조선왕조 태조실록에는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씨의 남은 자손들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목을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해바다 수장형 뿐만아니라 교살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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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강감찬 장군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강감찬 장군은 고려시대 문신입니다. 983년(성종 3)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 한림학사를 거쳐 평장사가 되었습니다. 1010년(현종 1)에 강조정변으로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키고 유배길에 살해했으며 현종을 옹립한 것을 빌미로 거란은 요나라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2차 침입을 합니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임명하여 대적케 했으나 크게 패하고 맙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신하들이 항복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강감찬은 절대 굴복할 수 없다고 전략상 일시 후퇴를 주장하며 현종에게 피신할 것을 권합니다. 왕은 나주까지 피신하였으나 사직은 지키게 됩니다. 이듬해에 국자제주가 되고 1018년(현종 9)에는 경관직인 내시사랑 동내사 문하평장사와 외관직인 서경 유수를 겸임합니다. 서경 유수는 단순히 지방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강감찬이 이 직을 맡게 된 것은 요나라의 침입에 대비한 것으로 보입니다. 1818년(현종 9)에 고려 현종이 입조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았다고 소배압의 10만 대군이 쳐들어왔습니다. 강감찬은 홍화진의 강 상류의 물을 막고 있다가 요나라 군사들이 도하할 때 막아둔 강물을 풀어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군사들이 혼란한 틈을 타서 요나라를 크게 무찔렀습니다. 이어 자주와 신은현에서 헙공하여 요나라군을 추격하여 귀주에서 적을 섬멸하여 살아 돌아간 이들은 겨우 수천에 불과할 정도로 큰 공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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