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우리나라 볼링의 도입과 역사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볼링은 매우 현대적인 경기여서 그 역사가 짧을 것으로 생각되기 쉬우나 사실은 현존하는 스포츠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BC 7000년 전의 이집트 고분에서 나무로 된 볼과 핀이 발견 되었고, 역사상으로는 13~14세기 경 중세 유럽에서 처음 볼링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중세의 볼링은 현재와 같이 게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종교상의 의식이나 점을 치는데 이용되었다. 독일의 교회에서 성행하는 의식으로서, 케겔(곤봉)을 악마로 간주하여 복도 구석에 세워 놓고, 둥근 물체를 굴려 케겔을 넘어뜨리는 종교적 의식이 치러졌다, 그러나 케겔 넘어뜨리기가 재미가 있어서 점차 신앙심과는 관계없이 취미로 즐기게 되었고, 교회 밖으로 나와 널리 보급 되었다. 한편, 볼링을 하는 사람(Bowler)을 “케구”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케겔에서 파생된 독일어의 흔적이다.
Q. 영화산업은 어떻게 시작을 하게 되었나요?
독립이후 6.25전쟁으로 나라 전체가 황폐해지고 여러 건물이나 장비들이 부서지며 1950년대 후반 부터는 영화 촬영 장비나 스튜디오가 많이 현대화 되었습니다. 재건을 하면서 외국의 장비들이 유입된것 입니다.1955년 김기영 감독의 '죽엄의 상자' 한국 최초 동시녹음 영화가 개봉하고 1957년에는 최성관 감독의 35mm 최초의 컬러 영화 '선화공주' 개봉.그 다음해 1958년 이강천 감독의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 '생명' 연이어 1959년 우수영화 외화수입 쿼터 보상 특혜제도 실시와 반공예술단 결성 그리고 서라벌 예술학교 설립, 전문인력 양성이 가능해 졌으며 극장도 들어서고 가장 큰 요인은 바로 국민들의 여가 생활의 관심 증가로 1959년 연간 제작편수 100편이 넘었고 TV 보급도 없는, 전쟁이후 오락수단이 부족한 여건에 문예,멜로 중심 영화가 나오면서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민들 마음을 달래줍니다.1969년 전국 1억 7천만명으로 관객이 급증하고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시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고 1970년대 국민소득 증가로 각 가구별 흑백TV 보급률이 늘었고 1980년대 드디어 컬러 TV 방영이 시작되면서 점차 극장을 찾는 발길도 자연스레 줄어들고 70~80년대 유신체제에 이어 군부 통지에 따른 검열제도도 강화되어 영화 뿐만 아니라 음반도 감소했고 장르도 많이 축소되었습니다.
Q. 우리나라의 전통 의상 중 갓이 있는데 갓의 유래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갓의 시초는 의외로 삼국시대부터 유래되었다.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신라 입형백화피모 모자나, 고구려 감신총 벽화에 등장하는 패랭이를 쓴 인물들이나, 원성왕이 꿈에 복두를 벗고 소립을 썼다는 삼국유사의 기록 등, 여러 자료들을 통해 갓의 존재시기와 기원을 추정할 수 있다. 이후 갓은 개화기인 1894년부터 단발령, 중절모 등, 서구문화가 정착할 때까지 1,500년 이상 한국 남성들이 즐겨 쓰던 장신구다.광의의 갓(립)은 모자 부분과 챙(양태)으로 이루어진 쓰개를 이르는 말로 삿갓, 패랭이 등도 포함하는 개념. 초기의 갓은 방립이라 하여 모자 부분과 챙의 구별이 희미하였으나, 챙이 생기면서 패랭이가 되었고, 짚으로 만들던 패랭이를 말총으로 만들면서 우리가 흔히 아는 갓, 흑립이 탄생하였다. 실제로 갓은 종류와 형태가 다양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갓" 하면 "흑립"만을 의미한다.
Q. 고산자 김정호는 어떻게 지도를 편찬 했나요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고산자의 옥사설은 광법위하게 퍼져 있으며 사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청구도', '대동여지도', '대동지지' 등이 몰수나 압수당한 일이 없으며 이병도는 옥사설을 강력히부인하고 있다. 실제로 '고종실록', '승정원 일기' 등을 면밀히 검토해 보아도 그러한 흔적은 발견할 수 없다. 그 증거로는 첫째, 고산자가 만든 지도나 지리지가 현재가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둘째, 대동여지도 판목이 현재 숭실일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고산자의 후원자였던 최성환 후손들도 '대동여지도' 판목을 다수 소장하고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대동여지도'의 판목은 압수 당하지도 소각되지도 않았다. 셋째, 죄인이라면 유재건이 '이향견문록'에 그를 수록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의 중인들의 활동사항을 기록한 '이향견문록' 권말에 고산자전이 추가되었으며 그 시기는 고산자가 죽을 무렵이었다. 넷째, 고산자와 교유했던 최한기난 최성환, 신헌 등이 고산자와 연루되어 어떠한 처벌을 받았어야 할 터인데 그런 기록이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신헌은 오히려 대원군 때 중용되었다. 위와 같은 자료들을 고찰해 보면 일제가 1934년 발행한 '조선어 독본'에서 비롯된 '고산자의 옥사설'은 대원군을 우매한 지도자로 볼기 위해 날조한 허구인 듯하다.
Q. 고무신은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신발이라 할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검정고무신:고무신을 최초로 신은 이는 '순종왕'었다고 하는데요,고무를 재료로 하여 폭이 넓고 굽이 낮으며 남자것은 갖신을, 여자것은 당혜라는 신발을 본떠서 만들었는 데 우리나라에는 1919년 '이하영'이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처음 창설하였습니다. 그 당시 짚신,미투리,갖신,나막신을 신을 때 고무신이 생산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으며 당혜, 짚신보다 방수가 잘되어 실용적이었으며 사용변천의 흐름은 1938년부터 1945년 이후 6.25 남침까지 전성기를 이루었다가 1960년경부터 고무신의 단점을 보완하고 발의 피부와 위생학적인 면을 고려하여 만든 신발 대중화 및 구두의 생활화로 그 선호도가 저하되어 오늘에 이른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