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화성에 탐사선을 보낸 나라는?
안녕하세요. 송종민 과학전문가입니다.1975년 8월 20일과 9월 9일 타이탄 3E-센토어 로켓에 의해 발사된 바이킹 1호 ·2호는 이듬해 6월 18일과 8월 7일 각각 화성 궤도에 진입하였고 곧 이어 궤도 모선으로부터 분리되어 화성의 표면에 연착륙하는 데 성공하였다. 바이킹 1호와 2호는 1980년 8월 7일과 7월 24일까지 모두 4,500장 이상의 사진과 화성 표면의 온도, 대기의 밀도, 바람의 속도 측정 및 토양의 분석 등에 관한 많은 자료를 지구로 보내어 화성 탐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좋은 성과를 올렸다.1988년 7월 5일과 12일 지구를 떠난 러시아 포보스 1호 ·2호는 1989년 3~4월쯤 화성에 도착하여 화성의 달인 포보스에 50 m까지 접근하여 각종 관측을 할 예정이었다. 포보스 1호는 발사 한 달 후 잘못된 명령으로 우주 미아가 되었고, 포보스 2호는 화성에 도착하여 초기의 임무를 수행 중인 1989년 3월 29일 연락 두절로 실종되어 포보스 탐사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다만, 포보스 2호는 통신이 두절되기 전까지 화성 적도 부근의 중요한 사진 15장을 지구로 보낸 바 있다.
Q. '첨성대'는 별자리를 관측한것이 맞나요
안녕하세요. 송종민 과학전문가입니다.역사적으로 첨성대(瞻星臺)는 그 이름대로 '별[星]을 보는[瞻]'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져 내려왔고 조선 후기까지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으나, 광복 이후 새로운 견해가 등장하였다. 우선 삼국사기에는 첨성대의 기록이 등장하지 않으며, 삼국유사에는 명칭과 용도, 사람이 오르내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 그렇다고 하기엔 내부가 매우 좁고 불편하다. 게다가 천문 관측을 하는 시설인데 정작 다른 천문대처럼 산 위나 높은 곳이 아니라 왕궁 옆의 평지에 건설되었다는 점도 의문으로 제기되었다.[6]그래서 첨성대의 역할이 천문대가 아니라 일종의 기념비 혹은 제단, 창고였을 것이라는 설이 등장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종교적 상징물(이용범 교수)', '과학 수준을 과시하는 상징물(김용운 교수)', '선덕여왕을 신성화하기 위한 도구(정연식 교수)'[7] 등으로 사용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며, 또는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이 자리에 과거 천문대가 있기는 했지만 목조 건물이었으므로 지금은 사라졌고 폐사지의 석탑, 포석정지의 석구(石溝)처럼 천문대의 '부속 건물'만 남은 것이 지금의 첨성대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들 역시 추측에 불과할 뿐 문헌적・고고학적 증거가 없어 확신이 불가능하며, 주류 학계에서는 정사에 기록된 통설과 신라 천문 기록의 정황 연구 등을 토대로 첨성대가 천문대였음을 정론으로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