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2월이 28일 또는 29일로 다른 달보다 날짜가 적어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그 연유는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부터 찾아 보아야 합니다.기원전 45년 기존의 달력(누마의 달력)을 수정하여 지구의 공전을 태양을 기준으로 산출한 1년은 365.25일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짝수를 불길하게 여겨서 홀수 달에는 31일, 짝수 달에는 30일을 배정했습니다.이렇게 되면 1년에 366일이 되는데, 마지막 12월에서 하루를 뺀 29일로 만들었습니다.근데 이러면 0.25일이 남게 되어 4년이 지나면 한번씩 마지막 달에 남았던 0.25일을 몰아 하루로 채운 것 즉 윤달로 4년마다 한번씩 오게 되는 것 입니다.카이사르는 7월생으로 자신이 태어난 달인 7월의 이름을 Quintilis에서 자신의 이름에서 딴 July로 이름을 바꿉니다. 이것은 전해지는 학설인데 빨리 취임하고 싶었던 카이사르는 11월 1일을 새로운 달력으로 공포하고 이날을 1월 1일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1월은 지금의 1월이 되고 12월은 지금의 2월이 된 것 입니다.당시 12월은 29일까지 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2월이 되면서 2월의 날짜가 29일로 바뀌게 된 것 입니다. 카이사르 다음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 7월보다 높은 8월의 이름을 Sextilis에서 자신의 아름을 딴 Augustus로 바꿨으며, 당시 짝수 달인 8월이 30일까지 밖에 없었는데 황제의 달이 다른 달보다 날짜가 적다하여 하루를 더해 8월이 31일까지 있게 된 것 입니다.이러면 366일 이 되어서 2월에서 하루를 빼서 2월은 29일에서 28일로 줄어 들었습니다.
Q. 새해 첫날이 1월 1일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질문자님 말씀처럼현재의 양력 1월 1일은 천문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천문학적으로 처음과 끝을 정할 수 있는 날은 동지, 하지, 춘분, 추분 4가지 밖에 없는데 태양력에 충분한 지식이 없었던 그당시 로마에서는1년을 10달로 정해 놓았기에 시이저의 이집트 원정 후 태양력을 받아들여 2달을 추가로 집어 넣게 됩니다.이후 로마는 자신들의 달력 체계를 유지한 채 2달만 넣다 보니 계속해서 7일 정도의 차이가 발생하자 각 황제 때 마다 윤달이나 윤년을 넣었넣었 뺐다가를 반복하여 오차가 심해져 갔습니다.후에 그레고리력에 의해 달력체계는 정해졌지만 새해는 그 당시 오차 일 중 어느날이 그냥 1월 1일로 굳어버려 오늘날에 새해가 1월 1일이 된 것입니다.
Q. 세인트루이스호 사건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세인트 루이스호는 약 937명의 유대인 승객을 태우고 쿠바로 항해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나치 독일에서 탈출해 안전한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쿠바 비자를 소지하고 있었고, 쿠바는 유대인 난민들을 수용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쿠바의 정치적 상황이 갑작스럽게 변하면서 그들의 운명은 점점 불확실해졌습니다.쿠바에서의 입국 거부1939년 5월 27일, 세인트 루이스호는 쿠바의 하바나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쿠바 정부는 난민들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쿠바 내에서는 이미 경제적 불안과 정치적 갈등이 고조되어 있었으며, 많은 국민들은 대규모 난민 수용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특히 쿠바의 대통령은 난민들에게 발급된 비자를 무효화시키고, 그들을 입국시키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는 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들은 배 위에서 무력하게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미국과 캐나다의 입국 거부세인트 루이스호의 승객들은 쿠바에서 거부당한 후, 미국으로 향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플로리다 해안으로 이동하며 미국 정부가 자신들을 받아줄 것을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이들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사회적, 경제적 불안이 높았으며, 반유대주의 정서 또한 확산되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미국 정부는 세인트 루이스호 난민들의 입국을 거부했고, 캐나다 또한 난민들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유럽으로의 귀환과 비극적인 결말세인트 루이스호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모두 거절당한 후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선박은 결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난민들을 분산하여 받아들였지만, 나치 독일이 유럽을 침공하면서 그곳에 정착한 많은 난민들이 결국 다시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약 250명 이상의 승객이 나치의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고, 세인트 루이스호 사건은 유대인 난민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