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마천루라는 말은 어떻게하다가 만들어진 말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마천루라는 말은 한자로 풀이하면 문지를 '마', 하늘 '천', 다락(누각) '루'로 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즉 하늘에 닿아있는 누각이라는 뜻인데요, 이는 영어인 skycraper를 그대로 한자식으로 번역하면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초고층 건물을 부를 때 쓰는 말이며, 도시화의 상징으로도 많이 쓰이는 단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Q. 김형석 독립기념과장은 왜 굳이 국회에 와서까지...
안녕하세요.사실 장본인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을 자리에 앉힌 것 부터가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의식이 올바른 사람은 아니라서요...독립기념관장이라는 자리 자체가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해서 더 깊게 연구하고, 그 역사적인 의의를 고취시켜야 하는 자리인데도 불구하고 편향적인 역사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립에 대해서 그렇게 자랑스러워 하는 사람도 아니구요... 개인적으로는 이전 독립기념관장이었던 한시준 교수님에게서 역사를 배운 사람으로써, 지금의 독립기념관장은 대단히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기자회견을 간 것도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이 1도 없어서 그 자리에 간 것이라고 생각되구요.
Q. 중세 유럽의 길드 제도가 경제 활동과 사회 질서 유지에 기여한 방식은?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중세 길드는 도시에서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끼리 뭉쳐진 일종의 합동조합입니다. 이러한 길드들의 활동으로 인해 도시 질서도 자연스럽게 안정되었는데요, 이는 같은 공동의 목표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길드 자체가 도제->직인->장인으로 이어지는 훈련 과정을 통해서 기술이 전승되다보니, 자연스럽게 숙련공들이 꾸준하게 배출되었습니다. 이러한 숙련공을 통한 제품 생산은 품질의 보증화를 가져왔고, 또 길드 내부에서 가격을 정하였기 때문에 가격적으로도 안정되어 경제적인 질서를 유지하였습니다.사회적으로도 길드는 도시 내에서 발언권이 있는 단체였기 때문에, 도시 정치에도 직접적으로 참여하여 자치권을 행사하였습니다. 이때 길드끼리 자연스러운 견제가 되면서 공공의 질서를 유지하였고 무질서한 상업 활동을 자체적으로 검열하기도 하였습니다.
Q. 고대 로마의 공중 목욕탕이 사회적 교류 공간으로 기능한 방식은?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고대 로마의 목욕탕은 단순히 씻는다는 행위를 위해 가는 곳이 아닌, 하루 일과에서 무조건 가게 되는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하나였습니다. 로마인들은 문명인이라면 깨끗한 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목욕탕을 이용했습니다.그리고 대형 목욕탕 안에는 단순히 씻는 욕탕 외에도 운동을 할 수 있는 팔레스트라(운동장으로 생각하면 됩니다.)와 토론을 위한 회의 공간이 있었고, 정원과 같은 휴게 공간도 있기 때문에 담소를 나눌 곳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이러한 장소들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친목을 다지고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목욕탕 금액 자체가 매우 저렴하였기 때문에, 계층에 상관없이 모두가 이용하였고 이는 정치가, 상인, 학자, 일반 시민까지 모두 참여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간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로마인들의 교류의 장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Q. 유럽에서는 중세시대 때 금식을 하면 맥주는 허용된다는데 왜그런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중세시대 카톨릭의 사순절은 이슬람교에서 하는 완전한 금식이 아닌, 육류를 먹지 않는 제한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곡물이나 채소, 빵은 허용이 되었습니다. 이는 카톨릭의 사순절은 사치를 절제하는데에 그 의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곡물은 허용 되었기 때문에, 곡물로 만든 맥주도 당연히 허용이 되었습니다. 맥주는 단백질도 많고 영양소도 많이 포함되어 있기에 오히려 금식 기간에 더 먹도록 권장도 되었다고 하네요. 많이 알려져 있는 파울리너 맥주가 금식기간에 먹던 "금식 맥주"로 유명한 맥주라고 합니다.
Q. 탕수육이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탕수육은 원래 딱 정해진 레시피가 있는게 아닌, 중국의 지역마다 서로 조리법이 다른 고기튀김 요리입니다. 그래서 광둥식 탕추류 / 탕추리지 / 동부의 꿔바로우 등 다양한 형태의 조리법이 있습니다.우리나라에 들어온 탕수육은 중국 화교에 의하여 들어왔는데요, 특히 인천의 차이나타운에서 유명해졌습니다. 당시 화교들은 우리나라에서 중화요리집을 정말 많이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지금의 탕수육으로 한국식의 입맛에 맞게 새콤달콤하고 찐득한 소스의 탕수육을 만들었습니다.1960~70년대에 중국집이 가정에도 대중화되면서 더 유명해졌고,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Q.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대한 분위기가 좋은 것은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대만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이유는, 반중의 성격이 일본 식민지에 대한 안좋은 기억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식민지 시절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대만인들은 적극적으로 독립을 외치지도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도 대만에서 무력을 행사하거나 폭력적으로 교육해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식민교육자체도 자발적으로 받기도 했으니까요. 식민지 시절 일본도 대만을 우수 식민지 사례로 보고 인프라도 많이 지어주고 하였습니다.그런데 해방 이후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의 부패로 인해 [차라리 일제시대가 좋았다]는 인식이 커지기도 하였고, 중국을 너무나도 혐오하는 대만인 입장에서는 오히려 [중국인보다 (일본을 통해) 고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더 낫다]는 인식이 강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Q. 우리나라역사에서 세계 열강들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조선말기 수많은 열강들이 조선에서 대립하게된 가장 큰 이유는, 지리적인 이점이 크기 때문입니다.당시 서양 열강은 서로 식민지를 넓히기 위하여 견제중이었고, 특히 영국, 프링스, 러시아가 서로 침예한 대립중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얼지 않는 부동항을 찾기 위해 계속 남하중이었는데, 조선은 바로 태평양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최고의 조건 중 하나였습니다. 이는 같이 식민지를 확장 중이던 영국과 프랑스에게도 영향이 갔구요. 이로 인해 영국과 러시아가 충돌한게 거문도 사건입니다.아시아에서는 청나라가 힘은 쇄약해졌지만, 조선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했습니다. 이때 급속도로 성장한 일본이 대륙으로의 진출을 꿈꾸면서, 그 시작점을 조선으로 잡았습니다. 이로 인해 청나라와 일본도 계속 충돌이 있었구요. 조선은 지리적으로 대륙과도 연결되어 있으면서 어느 바다로도 나갈 수 있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열강들한테 좋은 전초기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나라들이 조선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게 됩니다.
Q. 고대 중국의 진시황의 분서갱유 정책이 학문과 사회에 미친 영향은?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진시황의 분서갱유는 오직 진시황의 [법] 이외에는 어느것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법가 중심의 일원적인 이념으로 국가를 운영하겠다는 것이고, 말 그대로 강한 리더쉽 하나만으로 나라를 이끌겠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진시황의 이러한 정책이 잘 맞아떨어져서 진나라가 최고의 나라로 올라갈 수 있었지만, 다르게 보면 사상이나 학문의 다양성이 축소됨으로써 문화적으로는 쇠퇴하게 되었고, 선대의 지식들도 단절되게 되어 후대에 고대의 지식이 전승되지 않았습니다. 은/주나라에 대한 기록들을 찾아보기 힘든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현재 남아있는 중국의 고대 사상은 후대에 이르러서 진나라 이전의 사상을 상상, 재구성하여 편성하여 만들어 진 것이 대부분입니다.
Q. 김일성은 일제치하당시 실제 독립운동가였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김일성에 대한 평가는 많이 갈리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기록도 어디든 한쪽으로 기운 것 들이 대부분입니다.실제 기록 : 본명은 김성주로, 1930년대에 [동북항일연군]이라는 항일 유격대에 참여하였고, 이 유격대는 보천보 전투에도 참가. 이후 소련으로 가 소련군 소속으로 활동.이후 평가북한측 : 1930년대 만주와 간도 일대의 대부분 항일 운동을 주도.한국측 : 김성주가 항일 유격대 활동을 한건 맞지만, 규모는 크지 않음. 당시에 '김일성' 이름을 쓴 독립운동가가 다수 있어, 다른 이들의 업적을 본인의 업적으로 위장함. (실제로 1920년대에 '김일성 장군' 이라는 독립운동가가 있었는데, 나이로 보았을때 북한 김일성과 동일인 일 수 없음.)이런식으로 평가가 갈리고, 개인적으로는 현재 한국 학계의 주장이 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