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일본은 의약품 강국이 된 이유가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일본에서 제약 산업이 특히 더 발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책적으로 보았을때 정부에서 많은 지원이 있었습니다. 신약에 대한 허가가 간단하고, 국가 차원에서 연구 지원도 20세기에 적극적으로 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건강보험제도와 의약품 소비가 잘 연결되어 있어, 수익구조가 안정적이기 때문에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개발에 참여하기도 하였구요.위의 이야기는 표면적인 이유라면, 말씀해주신 인체실험도 큰 영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 2차세계대전 당시, 731부대라는 인체 실험 부대가 있었습니다. 조선인이나 중국인, 아니면 전쟁포로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였습니다. 세균이나 독에 대해서 어떻게 사람이 반응하고, 언제 죽으며, 어떤 치료제를 넣었을때 가장 오래 살아남는가를 실험하기도 하였으며, 동상이나 절단, 고열과 같이 극한의 상황에서 언제까지 사람이 버티며, 어떤 약품을 썼을때 오래 살아남는가에 대해서 연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당연히 의약품 개발에 큰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일본의 의약품이 크게 발달한건 그만큼 희생당한 사람이 많은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Q. 동로마제국에서 비잔틴제국으로 불리는 배경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동로마 제국이 비잔틴 제국으로 불린건 16세기 유럽의 학자들이 역사적으로 편하게 구분하기 위하여 학술적으로 붙인 이름입니다.당시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모두 자신들이 "로마제국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었고, 실제로 스스로를 로마제국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도 학자들이 구분하기 위하여 붙힌 이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고대에 번성하였던 로마제국과 구분하기 위하여 붙인 이름이었습니다.비잔틴제국이라고 학자들이 불른 이유는, 당시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옛 이름이 비잔티움이었기 때문이며, 비잔티움을 수도로 두고 있는 로마 제국 -> 비잔틴 제국으로 불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비잔틴 제국”이라는 명칭은 역사학적 편의 용어로, 동로마제국의 독자적 정치·문화적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16세기 이후 유럽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공식 국호나 주민들의 자칭은 여전히 “로마 제국” 이었습니다.
Q. 중국은 수많은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말씀해주신 것 처럼 중국은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같이 공존하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중국이라는 나라 전체로 보았을때는 한족이 약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국가 자체가 분열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또한 많이 알려진 위구르족이나 티베트족 처럼 중국 정부와 대치중인 소수민족들이 있으나, 다른 소수민족(대표적으로 조선족)들은 중국 내에 편입되어 살아가는 민족들이 많아 분열까지는 쉽게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약 분열이 된다면 가장 확률이 높은 곳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나 티베트, 내몽골 자치구와 같이 원래의 문화를 유지하는 자치구에서 출발하게 될 것 같고, 아마도 중국이 아닌 다른 외부의 개입이 있어 독립하려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공민왕이 즉위하게 된 정치적 상황은 어떠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공민왕의 정치적으로 즉위했을 때는 원간섭기 시절로, 즉위 당시에는 원나라에 영향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즉위 이후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면서 (홍건적의 난, 원나라 내부 분란 등) 자주적으로 힘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공민왕은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원의 영향력을 지우는 작업을 하면서 왕권을 강화시킵니다. 이전까지 사용하던 원나라 연호라던가 몽골식 제도, 풍습들을 폐지하고 원의 내정간섭 기구였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합니다. 그리고 북쪽 원의 통치 구역이었던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탈환하여 영토를 넓히기도 하구요. 이 당시 원나라는 많이 쇠약해져 있어 이를 보복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또한 당시에 민생을 어지럽히고 있던 권문세족들을 견제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신돈의 개혁을 들 수 있습니다. 권문세족의 토지나 노비들을 환수하도록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였고, 당시 권문세족과 결탁한 불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사대부들을 등용하였습니다. 이때 등용된 신진사대부들은 상당히 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이후 조선 건국의 기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때 관미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수군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던데 어떤 사료로 수군존재를 파악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고구려 관미성 전투에 대한 기록은 광개토대왕릉비문에서 그 내용을 확인해볼 수 있는데요, 그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백잔(百殘, 백제)과 신라가 옛부터 서로 원수였다. 왕이 몸소 정예 수만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가서 수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관미성을 포위하니, 성이 견고하여 20일간 공략했다. 성 안이 곤궁해져 마침내 항복하였다.”* 위 내용은 한문으로 되어 있어, 해석을 위해 검색을 하였습니다.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수군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 있었음으로 고구려 수군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Q.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는 경제나 국민의식수준보다 조금 처지는것같아요?
안녕하세요.개인적으로는 많이 동의하는 바 입니다. 정치적으로 보았을때 정치 부패도도 심각한 편이고, 서로 정권을 잡기 위해서 나라를 분열시키려고 하기도 하구요.아무래도 정치적으로 발전하기 전에 폭발적인 경제성장이 먼저 오게 되어서 정치적인 성장이 늦게 따라온 것도 있고, 젊은 세대와 중년층, 노년층이 서로 완전 다른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 그런지 갈라치기에도 좋은 상황이라 정치인들이 많이 이용하기도 합니다.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통합이 되는게 먼저라고 생각하는데, 정치인들은 본인의 기득권을 놓치기 싫어서 의도적으로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문제를 만들어 시야를 돌리려고 하는게 많습니다.
Q. 야인시대라는 드라마를 보면 김두한과 그 졸개들이 하는이릉 보면 정말 애국자 인데 이들이 유공자가 되지 못한 이유가 무엇 이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야인시대 드라마는 아무래도 드라마이기 때문에 많이 각색한 부분들도 있습니다.사실 김두환은 당시 유명한 깡패였으며 드라마에서 나오는 일본 야쿠자와의 싸움은 각색으로 만들어진게 큽니다. 깡패들끼리 구역 싸움 정도는 할 수 있었겠지만, 드라마처럼 독립운동가처럼 싸우고 하는건 드라마적인 표현으로 보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우리나라 사극 드라마 중에서 역사적으로 왜곡되어 만든 드라마도 정말 많으니, 드라마 보시면서 역사적인 배경도 같이 찾아보시는걸 추천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천추태후 같은 드라마는 역사적으로 왜곡이 많이 심하니, 이런 드라마들은 그냥 소설과 같은 거라고 생각해주시는게 좋습니다.
Q. 일본 근세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중요한 이유와 그리고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오다노부나가의 교토 입성은 당시 분열되어있던 일본을 하나로 통일시킬 수 있었던, 어떻게 보면 일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이전의 일본은 각각 지방을 다스리는 다이묘들이 중심이 되어 있었고, 중앙의 힘은 약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의 힘을 하나로 응집시키지 못하고 서로 힘의 균형만 유지하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오다노부나가가 교토에 입성하여 중앙 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이후 지방 다이묘의 세력을 견제하여 중앙 집권의 힘을 모으게 됨으로써 일본통일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오다 노부나가의 기반을 그대로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을 한 것만 보아도, 오다 노부나가가 죽지만 않았으면 일본을 통일하여 패권의 주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습니다.교토 점령 이외에도 화승총을 군사 전략용으로 활용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며, 지방 군벌처럼 군림하고 있던 일본 불교 사원들의 세력을 축소&흡수하여 중앙 권력을 강화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도로 정비와 자유 시장정책등을 시행하여 상공업을 발전시켜 이후에 일본 자본주의가 발생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Q. 고려 문화가 화려하고 양성평등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고려문화가 화려한 특징을 가지고, 또 여성에 대한 권리가 높았던 이유는 불교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가 가장 큰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조선시대와는 다르게 고려는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였고, 건국 당시에도 "불국토 건설"을 목표로 세운 불교 국가였습니다. 한중일 모두 종교와 관련된 예술품이 가장 화려하게 표현되는건 불교인데, 그 이유는 불교의 극락왕토를 장엄하고 눈이 부시게 표현하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속공예도 많이 발전하고, 불화와 같은 그림도 화려하게 많이 발전하였습니다. 또한 고려 사회는 귀족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귀족들은 상대적으로 부를 과시하고 사치를 모으는 경향이 있어 화려한 예술품들이 많이 유행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시 중국은 송(후기에는 원)나라였는데, 이 두나라는 국제적으로도 활발히 교역하였던 나라였기 때문에 화려한 예술품들도 자연스럽게 고려에 많이 들어왔습니다.조선시대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양성평등의 모습을 보인 것도, 불교적인 가치를 더 높기 쳤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유교 가치보다는 가부장적 기질이 강하지 않았습니다. 불교에서는 보살도 있기 때문에 여성도 충분히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보고 있었구요. 또한 고려는 신라와 후삼국의 영향도 많이 받았는데, 신라의 경우 여왕도 있을 정도로 여성에 대해서 비교적으로 정치나 경제적으로 참여가 많이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 이후에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에 당연히 여성에 대한 지위도 많이 인정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상속에 대해서도 형제/자매가 균등하게 분할 상속 받았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