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서 유독 유비를 덕장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때문인가요?
중국의 역사에서 유독 촉나라의 유비를
덕장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어떤 사건들이 근거가 되어야
덕장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인데
유비를 덕장으로 평가하는 역사적 사건들에는
어떤 사건들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
삼국지에서 유비(劉備)를 ‘덕장(德將)’으로 평가하는 역사적 사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백성을 이끌고 피난한 '장판파 탈출 사건'
208년 조조가 남하하자 유비는 형주에서 급히 피난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 유비는 전투력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수많은 백성을 버리지 않고 함께 이동하였습니다. 당시 군사적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백성과 함께 도망가면서도 끝까지 보호하려 노력했습니다. .이 장면은 그가 권력이나 효율보다 ‘민심’과 ‘덕’을 중시한 인물임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평가됩니다.
2. 제갈량을 삼고초려한 일화
유비가 유비에게 매우 중요한 책사인 제갈량을 얻기 위해 세 번이나 그의 초가집을 찾아간 일화는 유비의 겸손함과 인재를 얻기 위한 성의, 그리고 도덕적인 리더십을 상징합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는 훗날 덕장의 대표적인 일화로 회자되며, 단지 재능만이 아니라 사람됨을 중시한 유비의 철학을 잘 보여줍니다.
3. 관우와 장비에 대한 의형제 의리
유비는 관우, 장비와 ‘도원결의’를 맺고 평생을 함께하며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특히 관우가 조조에게 포로로 잡힌 뒤 풀려났을 때도, 유비는 의심하지 않고 그를 받아들였고, 이후 관우가 죽자 엄청난 분노와 슬픔에 빠져 오히려 전쟁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이는 유비가 사람과의 의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에서 ‘덕장의 품격’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안녕하세요.
현재의 유비가 덕장으로 많이 표현되는 이유 중 하나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의 주된 주인공이 유비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정사를 보면 사실 조조가 당시 삼국의 패권을 가장 크게 쥐고 있었음에도 유비를 주된 주인공으로 표현한 이유는, 나관중이 한나라 왕실의 정통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도 있습니다.
능력적인 면으로 보았을 때 조조보다 유비가 확실히 뒤쳐지기도 하였고, 당시 영토나 군사력으로 보아도 위나라가 압도적으로 잘 나갔기 때문에 유비는 인정이 많고 덕이 많은 것으로 많이 표현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비를 따르는 사람들 중 최고의 장군인 관우, 장비, 조자룡과 같은 사람이 있고 중국에서 최고의 지략가로 알려진 제갈량도 유비를 본받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을 덕이 많아 사람이 잘 따른다. 로 소설에서 많이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이전 초한지의 주인공 중 한명이었던 유방의 장점과도 일치하며, 한나라의 초대 황제와 같은 모습으로 유비를 표현함으로써 주인공의 서사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 정사에서 보았을 때는 유비가 덕이 많다는 말은 크게 없으며, 귀가 크고 사람이 잘 따른다는 정도의 표현만 있습니다. 옛말에 귀가 큰 사람은 덕이 많다는 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