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얼마전에 책에서 본것 같은데요 이슬람은 근본주의란게 있더라구요 이슬람 근본주의란 뭔가요
안녕하세요.이슬람 근본 주의는 19세기 후반, 즉 1800년대 후반에 나타난 종교적인 의식 회복주의 운동입니다.당시 이슬람 사회는 오스만 제국의 몰락과 서구 열강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많이 침체되어 있었는데요, 이에 따라 원래 전통적인 이슬람 질서를 화복하고 이슬람의 전통 법인 샤리아에 따라서 정치를 해야 된다는 이념이었습니다.당시엔 이슬람 전통이 많이 파괴되어 이슬람 전통을 지키자는 운동이었으며, 코란에 입각한 원리원칙주의, 서구 열강의 세속주의 배격 등을 모토로 삼았습니다. 현대로 와서는 그 의미가 많이 왜곡되어 테러 단체들의 정신적인 근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Q. 금나라 태조인 완안아골타는 실제로 신라의 후손인가요?
안녕하세요.금나라의 태조인 아골타가 신라의 후손이라는 말은 사실 학계의 정설이라고 하기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여진(말갈)계통 출신으로 보는게 정설입니다.문의주신 이야기는 일부 중국 측 기록이나 민간에 전승되는 문헌에서 신라인이라는 문구가 있어서 그런데요, 대표적으로는 [송막기사문]에 나와있는 "여진 추장은 본래 신라인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에 따라 아골타의 성인 [안완씨]를 왕씨, 즉 [김씨]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지는데요, 확실한 검증이 되진 않은 주장입니다.
Q. 송나라는 어떻게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확립했는가?
안녕하세요.송나라의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성립된 이유는 크게 (1) 지방 세력의 권한 축소 (2) 문인 중심의 황제의 권력 강화 두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우선 지방 세력의 권한 축소는 지방에서 군사력과 통치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던 절도사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과거제를 통하여 지방의 인재들을 중앙으로 불러들이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또한 군사도 모두 중앙으로 불러드려 다시 편제하기도 하였구요. 이로 인하여 주변의 이민족들을 견제할 지방의 군사력이 약해져, 송나라는 계속 이민족에게 시달리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송나라는 또한 무관보다는 문관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군대 지휘관을 문관으로 앉힐 정도로 문관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는데요, 이로 인해 무관의 군사 쿠테타 가능성도 많이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황제의 직속 기관인 추밀원과 어사대를 강화시킴으로써 중앙 집권적으로 관료제를 개편하기도 하였습니다.
Q. 고대 로마 제국이 막대한 영토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뭔가요?
안녕하세요. 로마제국이 당시에 강력한 제국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는 강력한 군사혁 / 타문화에 대한 유화정책 / 유연한 정치 체계 / 도로 교통망 등을 볼 수 있습니다.우선 [로마 군단]으로 표현되는 강력한 군사력이 당시 제국 확장에 큰 몫을 하였습니다. 중장보병 중심의 강력한 군사력은 당시 주변 국들을 점령하는데 많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이를 통해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 한니발과의 전투에서 승리 등 굵직한 전투에서 승리하여 영토를 확장시킬 수 있었습니다.또한 정복지의 사람들에 대해서 노예화 한 곳도 있으나, 일부 시민권과 자치권을 보장하고 그 곳에 수로/극장 등 인프라를 제공함으로써 타 문화와 융화하기도 하였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복민을 로마인으로 만들어 내는것에 성공하여 반란을 최소화 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점령한 지방까지 중앙집권의 힘이 끼칠 수 있게 정치 권력을 분산하기도 하였고, 이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총독을 파견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점령지를 통치하기도 하였습니다. 점령지는 로마법을 토대로 통치함으로써 단순 이민족의 점령지가 아닌 로마의 영토로써 자연스럽게 편입시켰습니다.마지막으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에서 알 수 있는 전국으로 이어지는 도로망을 연결함으로써 군사적/정치적으로조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근간을 만들고, 그들을 로마의 식민으로 만드는것에 성공하여 세계적인 제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Q. 조선시대의 무과시험은 창술과 검술이 나눠져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권 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무과는 이론/실기를 주로 보았습니다. 이론은 병서로 잘 알려져 있던 [육도],[삼략],[손자병법],[오자병법]과 같은 병법서에 대한 문제를 출제하였다고 합니다.문의주신 부부은 실기과목으로, 무예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주요 과목은 기창(말을 타고 쓰는 창술), 보장(걸어서 쓰는 창술), 편전(단거리 사격), 대궁(장거리 사격), 기마술(마상 무예 능력)이었으며 주요 과목에 검술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실제 전쟁과 전투 시 장병기 위주로 사용을 많이 하기 때문에 주요 과목에 검술을 포함하지 않았고, 장병기가 무너진 최후의 상황에서 검술을 쓴다고 생각하여 보조적인 무예로 보았습니다.정조 시대에 만들어진 [무예도보통지]에서는 검술 무예도 기록되어 있으며 정조 시대 이후에는 무예도보통지를 합격의 기준으로 보았다고 하니 좀 더 중요도가 올라가긴 하였지만, 무과에서 주로 보았던 과목은 창술과 활쏘기였습니다.
Q. 사인검은 언제부터 만들었던 것인가요?
안녕하세요.사인검은 "사악을 물리치는 검"으로 주술적인 의미를 담은 의례용 도검입니다. 최초의 제작 기록은 1398년으로, 태조 7년에 조선 왕실 전승을 통해여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사인은 12간지 중 양기가 최고조에 달하는 시간인 범인연, 범인월, 범인일, 범인시가 모두 겹치는 시점으로, 이 시기에 만든 검이 신성한 힘을 지닌다고 여겨졌다 합니다. 주로 관찰사, 통제사, 장군과 같은 고위직을 임명할 때 하사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