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스님들이 돌아가시고 난 후 몸에서 생기는 사리는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종교적 의미에서 사리는 수행의 결과로 비추어집니다.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기 위해 몸과 마음을 수행한 결과로 해석하며, 사리가 많이 나온다면 그만큼 많은 수행의 결과를 의미합니다. (아소카왕 전설에 따르면 부처님은 84,000개의 사리가 나왔다고 합니다.)과학적인 근거로는 많은 해석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 설은 고온에 의하여 몸안의 무기질과 뼛조각이 구슬형태로 굳어졌다는 설이 있습니다. 실제 사리의 성분을 분석하니 칼슘, 인, 규소와 같은 무기질 성분이었다고 합니다.또 다른 과학적인 주장으로는 채식과 좌식 생활을 많이하는 승려이기 때문에, 몸의 구성 성분도 일반인과는 다르게 화학작용을 하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Q. 중국과 우리나라는 환관이 매우 많았는데요 그런데 유럽에서도 환관문화가 있었는가요
안녕하세요.중국의 환관이나 우리나라의 내시와 같은 거세한 사람이 왕을 보좌하는 세력은 아시아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황제(왕)이 있는 궁안의 여자들 또한 황제의 것이었기 때문에, 상주하는 남자는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하지만 황제를 바로 옆에서 밀착 보좌하여 권력을 얻었고, 특히 황제가 급사하여 그 자식이 아직 어릴때 대신 통치를 하며 위세를 떨쳤었습니다.유럽에서는 하녀가 왕이나 황제의 여자를 뜻하진 않았기에 거세를 할 필요는 없었고, 비슷한 위치와 권력으로 시종장이나 고문이 존재했었습니다. 이들은 귀족출신이 많았기에 왕의 총애를 받으면 위세가 대단했었습니다.*특별한 경우로 비잔틴 제국에는 거세한 내시가 존재했으며,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같이 권력을 잡았을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럽에서 주로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Q. 고려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역사적 배경이나 중요한 사건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고려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 사건은 무신정편 전후로 보고 있습니다.무신정변 이전 고려는 옛 호족세력이 왕가와 혼인으로 엮이며 형성된 문벌귀족 중심의 국가였습니다. 음서제와 귀족끼리 혼인으로 귀족세력을 공고히했으며, 주요 지배계층으로써 군림하고 있었습니다.하지만 무신정변 이후 문벌귀족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고, 이후 지배세력은 무신-친원파-신진사대부등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고려는 외부로부터도 많은 영향이 있었지만, 내부의 지배계층이 계속 변화하면서 정치적으로나 나라 내정상으로도 상당히 많은 변화를 겪습니다.
Q. 장보고는 해적이라는 평이 있는데 실제로 어떤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나요?
안녕하세요.장보고는 통일신라 시대 청해진을 설치하여 당시 해상 무역을 장악한 무역의 중개자였습니다. 청해진은 통일신라 정부의 허가를 받아 세워졌으며, 그 역할은 민간 무역선과 해상 신라인을 보호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해적이라는 평가는 "민간 무장 세력이 해상 무역을 독점하였다"를 가지고 해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국가의 승인을 받아 설치하였고, 오히려 주위의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 치안을 유지하는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해적이라고 평가하기 보다는 국가에서 승인을 해준 "해상 민간 경찰"+"중개 무역 세력"으로 보는게 더 맞습니다.
Q. 신라의 단양적성비는 왜 만들어진 것일까요?
안녕하세요. 단양적성비는 현재 남아있는 신라시대 비석 중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신라 진흥왕 시대에 세워진 비석입니다.당시 신라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전쟁 중이었으며, 남한강 유역인 현재의 단양 지역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이후 백제를 배신하고 이곳을 단독 점령, 신라가 한강 상류를 확보하게 됩니다.단양적성비는 영토선언비석으로 보시면 되며,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이곳을 점령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역사적인 의의로는 상기에 기술한대로 삼국의 외교적인 기록을 확인할 수 있으며,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신라의 공신들의 이름과 관직을 확인할 수 있어 신라의 행정 체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Q. 태조왕건과 태조 이성계의 차이와 어떤 정책적이념이 달랐을까요?
안녕하세요.고려의 왕건과 조선의 이성계는 서로 상이한 정책 이념으로 나라를 건국하였습니다.당시 시대상황으로 보았을때 왕건은 분열되어있던 후삼국시대(고려, 후백제, 신라)를 전쟁과 포섭을 통해 통일국가를 건국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분열된 지방 호족 세력을 규합할 필요가 있었으며, 건국 당시 정책과 이념도 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왕건의 고려는 불교를 숭상하였는데, 이는 지방 호족을 포용하기에도 알맞았습니다. 또한 당시 강대했던 호족세력과 결혼을 통해 동맹관계&복속관계가 됨으로써 나라를 안정시켰습니다. 왕건의 유언으로 알려진 훈요십조에도 호족과의 좋은 관계를 당부했던것을 보면 이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 했었습니다.조선의 이성계는 망해가는 고려 대신 조선이라는 나라를 건국하였습니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이 건국되었기 때문에 이성계의 건국 이념은 건국에 정당성이 필요하였고, 유학을 더욱 숭상하여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당시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들이 유학자 출신이기도 하면서, 성리학적인 통치 이념은 망해가는 고려 대신 백성을 구원할 이성계에게 정치적인 정당성을 부여하여 주었습니다.조선의 건국 자체에 정당성 부여가 가장 큰 미션 중 하나였기 때문에 고려에서 숭상했던 불교를 반대적으로 억제하였으며, 성리학적 통치 이념을 공고히 하는 것에 그 의의를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