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이스라앨과 전쟁중인 하마스나 헤즈볼라는 ?
하마스란 아랍어로 '열정', '투지'를 뜻하지만 본래 명칭은 '이슬람 저항 운동'입니다. 1987년 팔레스타인 가지지구에서 창설되었으며, 이슬람 원리주의에 기반한 정치, 무장 단체입니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이슬람 국가 수립과 이스라엘 축출을 목표로 하며, 헌장상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지역 사회의 복지, 교육, 구호 활동도 병행합니다.헤즈볼라는 아랍어로 '신의 당'이란 뜻입니다.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이후 시아파 무슬림을 중심으로 레바논에서 결성된 무장 단체·정당입니다. 현재 레바논 남부를 주요 거점으로 하며, 이란의 지원을 받습니다. 시아파 이슬람주의와 반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 저항, 레바논 내 시아파 권익 보호, 이슬람 혁명 이념 전파를 주로 목표로 활동합니다.
Q. 고조선 중심지는 정말 평양이었나요?
고조선의 중심에 대한 논쟁은 오랜 기간 계속되었습니다. 최근 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중심지를 요서와 요동 일대였음을 주장합니다. 비파형 동검, 북방식 고인동 분파지역이 현재 랴오닝 조양 등에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중국 사료에서도 요동 벽지의 왕험성(험독현, 요하 하구) 등을 ‘조선왕의 옛 도읍’으로 보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4세기 연나라 진개의 침입으로 2000리의 영토를 잃고 한반도로 중심지가 이동했을 것이라는 추정합니다.즉, 전통적으로 , , 등 고조선의 중심지를 평양으로 비정한 기록이 있으나 여러 이견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고조선의 문화적·정치적 영역은 유동적이었으며, ‘평양’ 기록은 반드시 현재의 북한 평양만을 뜻한다고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반도로의 이동과 평양 도읍화는 고조선이 외부의 압력을 받으며 구조적인 변화를 맞은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Q. 제갈량은 천재 전략가인가요 실패한 정치가인가요?
제갈량은 오랫동안 천재 전략가이자 이상적인 충신의 대명사로 칭송받아 왔지만 실제로 그의 평가는 복합적입니다. 전략적으로 실제 역사에서 탁월한 책략가로 군사, 행정에 모두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적벽대전 등 중요한 전투에서 뛰어난 역할을 하였습니다.하지만 대규모 전투에서 대승, 창의적 전술 등에서는 그다지 혁신적이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북벌을 반복했지만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고, 이는 기본적으로 촉과 위의 국력(인구, 경제력 등) 격차에서 오는 구조적 한계도 작용했습니다. 정치가로서는 촉한의 황폐한 민심을 다잡과 농업, 군사, 산업, 재정 등 기반을 빠르게 안정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읍차마속은 제갈량이 아끼는 부하 마속을 군령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한 사건으로 그의 리더십과 원칙적 통치의 상징을 ㅅ아징합니다.
Q. 사인검은 언제부터 만들었던 것인가요?
사인검은 조선시대 주술적, 의장용으로 제작된 칼입니다. 전투용이 아니라 재앙과 사악을 물리치는 사용하는 상징적 주술적 도구입니다.사인검 제작의 기원은 태조 때인 1398년 무인년 처음 만들어진 것을 추정됩니다. 이후 왕권의 수호, 국가의 정기 보강, 재앙 방지의 의미를 담아 계속 전승, 제작되었습니다. 사인검은 '(寅)"이 네 번 겹치는 길한 시기(인년·인월·인일·인시)에 제작하도록 정해졌고, 호랑이의 힘찬 양(陽) 기운이 깃든다고 여겨졌습니다. 주술적 의미에 집중하여 제작되었기에 실제로 칼날이나 칼자루는 별자리, 부적의 글귀 등 주술적 상징이 새겨졌습니다.
Q. 17~18세기 유럽의 커피하우스 혁명이 정치와 사상 교류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17~18세기 유럽의 커피하우스 혁명은 정치, 사상 교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커피하우스는 단순한 음료 공간 이상으로 정치, 철학, 경제, 과학 등 다방면의 토론과 정보교환의 중심 역할을 하였습니다.특히 런던과 파리의 커피 하우스는 상류층과 지식인 정치 논쟁과 사상 토론의 장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근대 사상이 퍼져나갔으며, 시민혁명의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Q.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쓰촨성의 정치·사회 개혁 과정과 주요 사건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스촨성은 중국 공산당의 중앙집권적 통제 하에 정치, 사회 개혁이 진행되었습니다. 주요 과정은 토지 개혁과 농민 토지 분배, 1958년부터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 수립, 그리고 1966~1976년 문화대혁명 추진, 1978년 개혁 개방 정책 추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농업과 산업, 사회 질서 변화, 정치적 격변이 주요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Q. 기원전 약 12세기 경에 동지중해 고대도시 국가들을 멸망시켜버린 바다민족이란?
기원전 12세경 동지중해 지역에서 활약한 여러 해상 민족들의 통칭입니다.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으나 이집트, 히타이트, 우가리트 등 강력한 후기 청동기 도시국가들을 습격해 멸망, 또는 심각한 타격을 주었습니다.람세스 3세 시대 이집트 기록에서는 이들을 '바다에서 온 외지인'으로 묘사됩니다. 섬에서 집단 이주하여 육해 양면에서 기동력과 강한 군사력을 활용해 전격적으로 약탈과 정복을 했습니다. 주요 구성 집단으로 아카이와샤인, 루카인, 투르시아인, 셀덴인, 세켈레슈인 등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바다민족이 아틀란티스와 직접 관련되었다는 근거는 없으며, 오히려 그들의 활동은 지중해 연안 여러 문화권의 혼란과 쇠퇴를 불러온 역사적 현실의 일환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Q. 카르타고 항구 구조와 방어 시설 설계는?
카르타고는 현재 튀니지에 존재했던 고대 해양 국가로 한때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한 고대 국가입니다. 카르타고 항구는 상업 항구와 군사 항구로 나뉘어 설계된 매우 정교한 구조였습니다. 군사 항구는 원형 방파제와 내부 선박 격납시설이 갖춰져 있었으며, 빠른 출격과 효율적인 선박 관리가 가능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특히 선박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도록 둥근 모양의 항구와 방파제가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항구 방어 측면에서는 요새화된 벽과 성곽으로 외부 침입에 대비했고, 해상 접근로를 통제하는 강력한 수비 시스템이 작동했습니다. 로마와의 포에니 전쟁 중에도 카르타고의 항구는 매우 전략적인 요충지였으며, 해상군의 신속한 전개와 방어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Q. 포에니 전쟁(1~3차)에서 카르타고가 사용한 주요 전략·전술과 그 성패 요인은 무엇인가요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3세기에서 1세기까지 로마와 카르타고의 3차에 걸친 전쟁입니다. 1차 전쟁에서는 다단노선 전투함과 충각 돌격으로 초기 우위를 점했으나, 로마의 ‘코르비움’으로 패배했습니다. 2차 전쟁에서는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침공 후 포위 섬멸 전술로 승리했으나, 보급 문제와 로마의 반격에 결국 패배했습니다. 3차 전쟁은 방어에 집중했지만 병력과 자원 부족으로 멸망했습니다. 요약하면, 카르타고는 초기 전략에서 강점을 가졌으나 로마의 기술 혁신과 병참 우위로 장기전에 실패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