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고려, 조선 시대 왕릉은 어떤 구조였나요?
고려시대 왕릉의 외형 구조는 신라의 영향을 받아 봉분 주변에 다양한 석물들을 배치하였습니다.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조성되었으며, 봉분 앞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조선시대 왕릉의 외형 구조는 재실과 금천교와 홍살문이 있는 진입 공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재향 공간으로 정자각, 참도, 수라간, 수복방이 있으며, 진이 공간에는 비각과 예감, 산신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봉분이 있는 능침 공간이 있으며 주변에는 석물과 문무인석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고려와 조선시대 초기 왕릉의 봉분 내부는 석실 구조로 유해를 보관합니다. 잘 다듬어진 판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봉분의 천장을 기준으로 약 3.5m 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조 이후에는 석실 대신 돌과 흙을 혼합하여 만든 회격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세조가 석실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Q. 일제강점기에 이 기간동안 조선 총독을 했던 사람은 몇 명인가요?
조선 총독은 모두 9대 총독까지 이며, 3대 총독과 5대 총독은 사이토 마코토가 재임하여 실제로는 8명이 역임했습니다. 1대는 데라우치, 2대 총독은 하세가와 요시미치, 3대는 사이토마코토, 4대는 우가키 가즈시케, 5대 사이토 마코토, 6대 우가키 가즈싴게, 7대 미나미 지로, 8대 고이소 구니아키, 9대 아베 노부유키입니다.
Q. 삼국시대에 각 나라들이 불교를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삼국 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는 영역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영역국가로써 넓은 영토를 통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각 지역은 부족마다 신앙이 달랐으며, 통일된 종교가 필요했습나다. 즉 국가적 사상 통합을 위해서 불교가 필요하였습니다. 불교는 국가 통합에 유용했습니다. 게다가 블교는 왕즉불 사상에 입각하여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신라는 진종설, 불교식 왕명 사용을 통해 왕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귀족은 업설을 통해 자신들의 특권을 정당화할 수 있었습니다.이런 이유로 고구려는 4세 소수림왕, 백제는 4세기 침류왕, 신라는 6세기 법흥왕 당시 불교를 공인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