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시대에 고려삼은 이라고 기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저 셋이 삼은으로 불리기 시작한 시기와 이유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다만 조선 중후기의 사림을 형성하는 성리학자들이 다름 아닌 야은 길재의 후학들이기 때문에, 이색-정몽주-길재로 이어지는[2] 동방 성리학의 거성들을 숭상하기 위해 여말삼은이라 칭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즉 이에 따르면, 이숭인이 삼은에 포함되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정도전의 모략에 의해 장살당해 제자를 못 남겼기 때문. 사망 당시 이숭인은 46세였다. 젊다고만 할 수 없는 나이인데도 그 이전에도 확실한 제자를 두지 못한 이유인 즉, 이 아저씨는 고려 정국이 변할 때마다 족족 귀양길에 오르는 신세였기 때문이다. 사대부가 탄압받을 때는 사대부라 귀양가고 이인임이 몰락하자 이인임 친척이라 귀양가고 조선건국 즈음엔 고려유지파라 귀양가고.참고로 당시 고려에는 은(隱)자를 호에 쓰는 경향이 매우 많았다.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킨 사람들을 조사해보면 은자 돌림 호가 꽤 많이 나온다. 대표적 인물이 대은(大隱) 변안열. 심지어 권문세가의 수장 이인임도 초은(樵隱) 이인복이라는 멀쩡한 형을 두었다. 신진사대부에서 권문세가 쪽으로 변절한 동정 염흥방도 어은(漁隱)이라는 호도 썼었다. 이런 현상은 당대 헬게이트나 다름 없었던 고려의 상황을 사대부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말하자면 '은일(隱逸)' 의식이 당대 사대부들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이색은 이런 은일의식이 지배하는 당대의 지식인 풍조를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는지 제자 이숭인이 '도은'이라는 호를 짓자 "나야 늙었으니 괜찮지만, 자안(이숭인의 자)은 앞길이 창창한 시기인데 은(隱)으로 이름하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비판했으며, 정몽주에 대해서는 "달가(정몽주의 자)는 채소밭에 숨어 있으나 조정에 서서 유학의 부흥을 자임했고, 엄한 얼굴로 학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러니 그는 진정으로 숨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Q. 사람의 관상이나 손금,사주 등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리심리상담사란?명리심리상담사란 명리를 통한 성격 및 적성 심리검사의 오류를 보완하고 내담자의 본성을 통해 진로를 과학적으로 평가함으로서 내담자의 경제적 비용과 시간, 노력을 절약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내담자 자신의 적성을 알고 진로를 스스로 선정할 수 있도록 상담자가 안내와 도움을 주는 심리 전문가를 말합니다.※ 진로 및 전망명리심리상담사는 자격증 취득 후 학교기관에서 운영하는 진로 및 성격검사 프로그램에 참여가 가능하고 적성검사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개인심리치료센타에서 심리검사 분야에 명리심리상담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많은 심리검사 도구가 많이 있는 실태입니다. 하지만 심리검사의 오류를 조금이라도 과학적으로 평가 할 수 있는 가장 유일한 검사방법이라고 판단하며 다른 검사도구와 병행 해서 사용한다면 승수효과를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명리심리상담사는 산업체 및 심리상담소에서 많이 필요로 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활용유형- 심리분석사, 심리상담사, 임상심리상담사, 진로코칭 종사자- 주요활용처 : 아동지도교사, 사회복지관, 학교기관 상담사, 개인심리상담소 및 쉼터, 사회복지시설, 아동상담센타, 청소년상담소, 지자체, 교회 등 종교시설, 기타 학생 문제 예방상담소운영 등
Q. 한국인을 몽골인들의 후예라 할 수 있나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유전적으로는 몽골의 후예라고 할 수는 없지만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이야기가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몽골풍, 고려양 과 같은 말들입니다. 몽골의 문화가 고려로 퍼져나간 주요한 경로는 당시 몽골에게 빌붙어 권세를 누리던 친원파들, 몽골 황실에서 성장했던 왕자들[1], 그리고 고려 왕에게 시집온 몽골 공주들[2]을 통해 들어오거나 고려에서 실용적인 이유로 직접 수입하여 받아들인 경우들이었다.대표적인 사례를 찾자면 먼저 식생활에서는 알코올을 증류해서 빚는 소주, 소의 뼈를 물에 삶아 파를 넣고 끓인 설렁탕, 우유에 쌀가루를 곱게 갈아서 만든 타락죽과 순대 등을 들 수 있다.[3] 또 몽골식 버터인 수유(酥油)도 몽골풍 중 하나다.의생활에서는 일부 남자들이 변발[4]을 하기도 했고 여자들은 예장에서 쓰는 족두리와 신부가 머리 장식으로 쓰는 산호 구슬 꾸러미의 도투락 댕기, 한복에서 허리띠를 대체하게 된 옷고름, 무관들이 주로 입고 나중에는 사대부들도 널리 입게 된 철릭 등이 몽골풍에서 유래한 것이다. 경번갑과 두정갑이 한반도에 유입된 것과 환도가 곡도 형태가 된 것도 이러한 몽골풍의 영향이었다.언어생활에서는 당시 몽골어와 원나라시대 중국어가 어원인 단어들이 몇 가지 남았는데, 임금님의 밥상을 부르는 수라, 장사치나 벼슬아치 등과 같이 어미에 -치(赤)를 붙이던 것도 이 때부터다
Q. 삼국시대의 문화재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백제의 미륵사지석탑과 신라의 분황사모전석탑, 의성 탑리오층석탑 등의 석탑과 익산 연동리석불좌상, 예산 화전사방불을 비롯해 신라의 불곡석조여래좌상, 삼화령 미륵세존, 배리삼존석불 등의 석불이 조성되어 선사시대의 그것과는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을 만큼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Q. 삼국시대의 목탑 양식과 석탑 양식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두시대의 석탑의 느낌에 대한 차이점을 말씀드리면 대체로 신라계 석탑이 날카로운 직선을 많이 쓰고, 옥개석(옥개석은 탑의 지붕돌 받침을 말하죠) 받침과 처마의 거리가 짧아 강건하고 이지적인 느낌을 주는데 반하여, 백제계 석탑은 석재 절단부의 모든 각형을 죽이고 직선에 가까운 곡선을 주로 써서 목조건축의 효과를 노렸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따사로운 감이 흐릅니다. 그리고 신라계 석탑이 모전석탑 이후 불국사 3층석탑(석가탑) 등으로 발전하면서, 석재를 단일재를 주로 사용한 반면, 백제계 석탑은 다수의 별도 석재를 사용하여 조립하며 목조건축의 구성기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건축물을 보시면 가장 아래에 쌓인 돌이 있는데, 그걸 기단이라고 하거든요. 백제탑의 경우는 1층 지붕석의 폭이 기단의 폭보다 넓어, 빗물이 기단 밖으로 떨어지고요. 반면 신라탑은 1층 지붕석의 폭이 기단의 폭보다 좁아 빗물이 기단으로 떨어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비를 막아주는 처마가 상징적인 목조건축의 특징과, 짧은 처마가 특징인 전탑의 차이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죠. 결국 목탑 및 전탑을 그 시원으로 삼는 양시대의 탑의 조형이 확연하게 달리 나타나는 결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