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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을 공유하고 모르는 것을 함께 공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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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준 전문가
맑은글터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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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통일신라시대에서 왜 수도를 안 옮겼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통일신라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완전한 통일이 되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무너졌으나 처음에는 당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고구려의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세력을 행사하는 등 하였고, 이후 신라와 연합할 당시 약속을 어기고 욕심을 보이자 신라가 되려 고구려부흥세력과 손을 잡고 당을 공격하는 등 나당전쟁을 하였습니다. 결국 나당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인해 당이 물러갔으나 그와 함께 대중상, 대조영, 걸사비우 세력이 과거 고구려의 영토와 주변 동맹부족영토를 아울러 고구려유민, 말갈 등과 연합하여 후고구려를 세웠고, 이후 국호를 진이라 바꾸었습니다. 후고구려의 세력이 너무 강성해지자 그것을 포섭하기 위해서 당에서는 713년 대조영에 발해군왕으로 책봉하였습니다. 인정은 하나 자신들의 아래로 인정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대조영 때는 그대로 국호를 진이라고 유지하였고, 별도의 연호까지 사용하는 황제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당의 국력이 강해 주변국들은 당의 판단을 기준으로 하였기에 국호를 발해로 외교적으로 하였다고 추측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 고대국가의 영토 북쪽은 대진국 발해가 남쪽은 신라가 차지한 형국이 되었기 때문에 굳이 수도였던 경주를 버리고 천도를 할 필요성이나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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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유비가 아니라 관우가 대장이었다면?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가정한다는 것이 어렵지만, 관우가 리더였다면, 유비, 관우, 장비의 세력은 국가를 이루지 못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유비는 무예가 출중하지는 않았고 우유부단한 면이 있다고 하나 지혜롭고 겸손하였습니다. 그리고 황실의 후손이라는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삼고초려를 하는 등 하여 제갈량을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였고, 인성과 명분으로 방통 등 많은 인재들이 함께 하였기에 그 세력을 공고히 다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관우는 어쩌면 여포와 같은 부류이기에 극강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도 전장에서 그를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나 관우의 그러한 능력이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고 강하다는 자만으로 시야가 좁아질 것이고 그것이 그를 몰락하게 할 것이고, 그 세력들은 다른 세력에 흡수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 유비처럼 촉을 건국하는 단계에 까지는 가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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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청일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강화조약은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알고 있는데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의 확립 이외에 어떠한 것들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95년 4월 17일에 하관에서 조인, 5월 10일 발효되었다. 정식 명칭은 ‘청ㆍ일 양국의 강화조약입니다. 1894년 8월에 시작된 청ㆍ일전쟁의 강화 조약은 본문 14개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청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히로부미가 체결하였습니다.그 세부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1.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 (청은 조선에 간섭하지 마라 우리 일본이 차지할 것이다 라는 흑심이 들어있음)2. 청국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와 타이완(臺灣) 및 평후섬(衝湖島) 등을 일본에 할양한다3. 청국은 일본에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한다4. 청국의 사스(沙市)ㆍ충칭(重慶)ㆍ쑤저우(蘇州)ㆍ항저우(杭州)의 개항과 일본선박이 양쯔강 및 그 부속 하천의 자유통항인 용인, 그리고 일본인의 거주ㆍ영업ㆍ무역의 자유를 승인한다. 이 중 랴오둥반도의 할양에 대해서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3국이 그 반환을 일본에 요구하게 되어 일본은 3000만량을 청으로부터 받고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였습니다.[세부내용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시모노세키 조약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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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신하들이 신돈을 싫어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돈은 승려로서 공민왕 중기 책사의 역할을 하며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던 인물입니다. 공민왕 주기 급성장한 무장세력과 권문세족들을 숙청하는데 공을 올렸으며, 사회 개혁을 단행하는 개혁가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왕의 승려인 국사로서 국정자문 수준의 간언하는 것이었으나 왕이 그에게 의지하고 많은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신돈도 다른 신하들이 왕과 접촉하는 것을 제한하고 흡사 자신이 왕인양 모든 것을 결정하는 형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돈 자신이 그렇게 했다기 보다는 무인세력과 권문세족들의 권력으로부터 왕권을 재확립시키기 위해 공민왕이 신돈을 도구로 사용한 것이 아니었는지 의심스러운 부분입니다. 신돈은 공민왕에게 전권을 부여받고 짧은 기간 동안 신흥무장세력 및 힘있는 권문세족들을 모두 숙청하였습니다. 이런 후 신돈 집권 당시에도 그가 흉상이라며 멀리하라고 신하들이 간언하였고, 군신관계를 어지럽힌다고 상소하였지만 공민왕은 되려 이들에게 벌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왕권을 확립하고 신흥무장세력과 권문세족들의 득세가 잠잠해지자 공민왕은 자신의 진면목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먼저 신돈이 사심관제도를 부활시켜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립하려는 것을 부결시켰고, 수도를 충주로 천도할 것을 신돈이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공민왕 19년 신돈을 매개로 한 정치를 마치고 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공민왕 20년 신돈을 역모의 죄를 물어 죽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볼 때 신돈은 공민왕의 왕권을 확립하고 신흥무인세력과 권문세족들을 숙청하고 새로운 통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신돈의 모습은 신하들의 눈에는 암적인 존재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러니 생김새와 여러가지 비리들을 내세워 왕에게서 멀어지게 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흐름이 공민왕이 계획한 것이었다면 공민왕이야 말로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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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구려 때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한 왕, 그 왕의 업적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 때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왕은 장수왕입니다. 장수왕의 업적은 다음과 같습니다.1. 남진정책아버지인 광개토태왕은 북진을 추구하여 영토를 넓힌데 이어 남진정책으로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기고, 신라, 백제의 성을 차지하여 영토를 넓혔으며, 중국 남조의 여러 왕조와 북위, 북조와 화친을 맺고 조공외교를 하여 남진 중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것을 방지하는 외교를 펼쳤습니다. 2.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황제국으로서의 면모 연가, 연수, 건흥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사료에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충주 고구려비를 세워 선대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리는 등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자적인 황제국으로서의 기상을 드높였습니다. 3. 국내 정세의 안정 추구집권 초중기에는 남진 정책으로 영토를 확장한 후 후기에는 내정에 집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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