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고조선이 우리나라 역사서에 처음 등장한 역사서는 어떤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조선은 원래 조선이라는 이름의 국가입니다. 하지만 1,500년 후에 조선이라는 국가가 같은 이름으로 건국되었기에 구분하기 위해서 옛 고자를 붙여서 고조선이라고 후대에 명명하였습니다. 고조선이 언급된 국내 사서로는 삼국유사, 제왕운기가 있습니다. 환단고기로 통칭하는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등에서 고조선에 대한 내용이 있으나 환단고기는 아직까지는 인정받지 못하고 위서 논쟁이 여전하기에 제외합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환단고기의 내용이 후대에 다시 작성된 것이지만, 그 내용 등이 중국 고서 등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은 점 등을 제기하며 진서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나오고 있습니다.)중국의 사서에도 고조선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기원전 7세기 경에 제작되었다 전해지는 관자에도 고조선의 존재가 기록되어있으며, 고기, 위서, 구당서, 산해경, 사기, 한서, 정사삼국지, 후한서에도 고조선의 존재가 명확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가진 고조선에 대한 직접적인 사서는 없지만, 그 존재를 인정할만한 사료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Q. 식민시 시대 일본이 우리역사를 왜곡시킨 이유?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 조선은 일본을 왜라고 부르며 오랑케 취급하며 역사적 문화적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지식인, 지배층이었던 이들이 식민지 하에서도 일본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이에 일본은 우리의 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우리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고, 유구한 우리의 역사를 한반도에 한정시키며, 자신들이 조선을 침략한 것에 대한 당위성을 세뇌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광활한 영토를 호령했던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축소시켜야만 자신들이 더 대국이고 망해가는 조선을 구해주었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죠. 이러한 역사에 대한 왜곡은 식민지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인식되지 못하였으나, 현재에 와서는 많은 강단 사학자들이 당시 왜곡된 역사를 배웠던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이 국민들에게 계속해서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그 왜곡된 역사가 진실인 것처럼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변국의 사서 등을 연구하여 우리의 역사가 잘못되었다 문제제기하고 재조명해야 한다고 하는 사학자들을 미신이나 신봉하는 문외한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역사 공부를 하는 학생들도 석-박사 과정에서 그러한 기존의 강단의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어놓은 틀을 깨는 논문을 제출하연 석-박사가 될 수 없는 어이없는 학계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일본의 장기적인 책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웃나라로 일본과 잘 지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역사까지 우리의 연구와 시각이 아닌 일본이 재단해놓은 틀에 갇혀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Q. 조선시대 왕의 사위는 어떤 지위와 권한을 가졌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왕의 사위인 부마는 조선 초기에는 중매 등을 통해 혼인을 하였으나, 공주와 달리 옹주의 경우 후궁의 자제라는 이유로 명망 높은 양반가에서는 고사하는 경우가 발생하여 조선 후기부터는 간택령에 의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혼사를 거절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안이었습니다. 부마는 공주와 혼인한 경우 정 1품, 옹주와 혼인한 경우 정 2품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에 따른 정부의 재정적 지원(집, 노비, 녹봉(월급))과 권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마는 관직에 나갈 수 없었으며, 첩을 둘 수 없었고, 공주나 옹주와 사별한 후에도 부마의 지위는 유지되었으나 재혼할 수 없었습니다.
Q. 신라시대 화랑은 처음누가 만들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시대 화랑의 공식 제도적 설치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진흥왕 37년(576)에 나옵니다.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이보다 앞선 시기에 화랑 사다함에 대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어 그 기원을 원화(源花)가 만들어진 때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집답이었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에 조의선인라는 집답이 있었고, 백제에는 무절 혹은 수사, 신라에는 화랑이 존재하였듯이 과거부터 종교 및 사상과 연계되어 유사 시 국가를 위해 나서는 조직이 있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직들은 어린 시절부터 애국심을 함양하고 무예와 학문을 익히는 일종의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것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던 전통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배달국에서부터 이어저 내려온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배달국을 열었던 문명집단으로 핵랑이라는 집단이 존재하는데, 중국 본토 쪽에 영토를 두고 있다가 동방의 개척에 나서게 되는데 삼신산이었던 천산, 삼위산, 금악산에서 태백산(백두산)으로 옮겨 다시 개천을 하였는데, 이 때 성직자이자 국가상비군이자 인재를 양성하는 삼랑이라는 관직을 만든 것에서 그 뿌리가 있다고 합니다. 이후 단군조선의 국자랑,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무절 혹은 수사, 신라의 화랑, 그리고 고려의 재가화상(국선, 선랑)으로 각 국마다 발전되었다고 보는 설입니다. 삼성기라고 하는 사서에 그 시작이 나와있고, 태백일사라고 하는 사서에 랑은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이라고 나와 있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당시는 정교 분리가 되어있지 않은 시대였고, 충분히 가능성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교단사학계에서는 삼성기, 태백일사 등 소위 묶어서 환단고기라고 칭해지는 사서를 위서라고 판단하고 있지만, 여러 내용을 보고 주변국의 사서와 비교해보았을 때 원서가 존재하지 않지만 그 내용은 진서라는 의견들이 최근 연구에 의해 제기되고 있습니다. 말씀주신 화랑의 기원은 이러한 고대부터의 낭가사상이 전해내려오고 국가가 독립적으로 분리되면서 각각의 이름으로 불리며, 발전해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