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옛날 유럽에서 일어났었던 십자군 전쟁에 대해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십자군 전쟁이 있었던 11세기 말, 비잔티움 제국은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바실레이오스 2세가 죽은 뒤, 무능한 후계자들이 계속 즉위했습니다. 지방의 권력은 강화되고, 궁정의 지출이 증가된 반면 세입은 줄었습니다.외부에서는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족이 소아시아를 공격했고, 만치케르트 전투(1071)에서 비잔티움 제국이 패하여 소아시아를 상실합니다. 제국의 서쪽에서는 노르만족의 공격이 거셌습니다. 이런 상황에 즉위한 알렉시오스 1세는 대외적 위협을 제거할 군대가 필요했습니다. 그리하여 교황, 신성로마제국, 베네치아 등에 도움을 요청합니다.한편,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요청을 받자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호응합니다. 교황은 십자군 전쟁으로 1) 동서교회의 통합과 모든 교회에 대한 교황 수위권 확립, 2) 유럽 안에서의 평화를 달성, 3)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이러한 배경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Q. 백제 성왕당시 남부여로 국호를 바꾼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을 잃습니다.그리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죠.그러나 백제의 천도는 급격한 상황에 따라발생한 사건이었기 때문에,웅진 시기 백제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그래서 동성왕이 귀족에게 암살되기도 합니다.무령왕 시기부터 백제는 국력을 점차 회복합니다.고구려와 싸워 이기기도 했고요.그러자 무령왕은 중국에 보낸 문서에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更爲强國]" 고 하죠.성왕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하였고,비좁은 웅진을 떠나 수도로서 적합한사비를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습니다.그리고 부여의 계승자 타이틀을 두고 대립하던고구려를 꺾고 한강 이남을 회수하면서진정한 부여의 계승자는 백제라는 의미로써"남부여" 국호를 칭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따라서 성왕의 국호 변경은- 웅진 시기의 위기를 극복하였다는 자신감,- 성왕의 개혁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Q. 이괄의 난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괄은 반정에 참여하여 2등공신에 책봉됩니다.그는 군사적 재능이 탁월한 듯 한데,반정 당시 군사들이 우왕좌왕 하며 흔들렸으나이괄이 대장이 되자 군이 정돈되었다 합니다.인조가 즉위한 뒤 조정은 그를부원수 겸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제수합니다.당시 북방에 자리한 후금의 위협이 문제가 되어이를 대처할 유능한 인재로 이괄을 선발한 것이죠.이괄은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에 최선을 다해군사 훈련, 성곽과 목책 보수, 북방 경계에만전을 기하였습니다.그러나 인조 2년인 1624년,이괄의 아들 이전을 포함한 여러 인사들이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이 올라옵니다.이에 대신들은 이괄을 소환하여 조사하라고 하나인조는 고변의 진위를 의심하여이괄을 조사하는데 끝까지 거절하였습니다.다만, 이괄의 아들 이전을 소환해 조사토록 했는데이때 이전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이괄은 아들이 끌려가 모반죄로 처형되면자신 또한 무사하지 못할 거라 여겨 거병합니다.이에 정예군 1만과 항복한 왜군 300여 명을 거느려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 서울을 점령합니다.인조는 이괄을 피해 공주로 파천하였습니다.그러나 곧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부대와안현에서 전투하여 이괄의 군대가 패배하였습니다.이괄은 도주하였으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고그렇게 이괄의 난은 진압되었습니다.이괄의 난은 인조 정권 초반에 있었던공신 간의 갈등과 지나친 견제가 불러온 사건이며,이괄의 부하 중 일부가 후금으로 도주하여조선의 사정을 알림으로써 정묘호란이 발생하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특징을 지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