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고려때 현종을 황제로 세운 강조란 장수는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강조는 강장자 가문 사람인 강태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강태주는 태조 왕건의 먼 외척으로 강호경과 강충, 강보전의 후손이었으나 가계가 불분명합니다.강조가 태어날 무렵 그의 일족 중 왕비가 나왔고, 태조 왕건은 자신의 먼 친척이기도 한 신천의 호족 강기주의 딸을 22번째 부인인 신주원부인으로 삼았는데, 강조는 신주원부인의 친정 일족이었습니다.983년 성종 임금의 하급 궁료로 천거된 이후 991년 무관으로 관직에 본격 출사, 997년 고려 제 6대 군주인 성종이 후계를 이을 아들이 없이 죽고 목종이 보위에 오르자 이때 왕의 나이가 아직 18세임에도 불구하고 모후인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게 됨에 따라 외척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앞서 천추태후와 추문을 일으켜 유배되었던 김치양도 다시 불려와 중용, 김치양은 마음대로 정치를 하면서 1003년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는데 이때 그는 여러 관직을 거쳐 중추사 우상시로 있었으며 외직으로 나가 서북면도순검사가 됩니다.목종이 병석에 누워있으면서 김치양의 계획을 알고 황보유의를 파견해 대량원군 순을 맞아 오게 하고 또 전중감 이주정이 김치양에게 아부하는 것을 알고 임시로 그를 서북면 도순검부사로 임명해 보내면서 즉일로 다시 강조를 궐 내로 불러들여 숙위하도록 했습니다.목종은 대량원군 순을 후계자로 삼고, 궁궐 수비를 위해 중추사 우상시 겸 서북면 도순검사인 강조에게 개경의 궁월을 수비케 했고, 이때 세간에서는 목종이 위독한 틈에 김치양 등이 나라를 빼앗으려 하다는 풍문이 돌았고 왕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전해지자 강조는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오던 도중, 평주에서 왕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보고를 듣고 한때 주저했으나 부하 장수들과 회의 후 개경으로 가 목종을 퇴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이와 함께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태후와 그 무리들을 귀양보냈으며, 양국공으로 폐했던 목종을 죽였습니다.이어 왕실의 부패를 척결하고 새로이 관제개혁을 실시, 국왕의 측근 보좌기구인 은대와 중추 남북원을 일시에 혁파하고 대신 중대성을 설치, 이때 중대사에 올랐으며 1009년 이부상서참지정사가 되어 당시 제일의 실력자가 됩니다.강조의 정변 이후 1010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황제 성종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 강조는 통주에서 30만의 군사로 거란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고 사로잡혔고, 장수 이현운과 함께 포로가 됩니다.거란의 황제였던 성종은 강조의 인품을 보고 자신의 신하가 되어 권력을 누리자는 제안을 하나 이현운 장군만 응하고 강조 장군은 끝까지 제안을 거절하다 처형되었습니다.
Q.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서 설명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조선은 단군왕검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한반도 최초의 고대 국가입니다.본래 국호는 조선이나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고조선으로 합니다.역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고조선이 청동기 문명을 기반으로 한 현 중국 랴오닝성 및 북한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에 있던 고대 국가로 파악합니다.8조법이라는 법률이 정해져있었는데 이 법은 권력층의 사회질서 유지 수단이며 가부장 중심의 계급사회로서 사유재산을 중히 여겼고 응보주의에 따른 형법을 지녔던 당시 사회상을 반영합니다.당시 고조선 사회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계급 분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8조의 법금 중 현재 전해지는 3개 조항에서 화폐 개념과 노비의 존재, 사유재산에 대한 보호 조치를 볼수 있으며 이 시기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부장품들은 계급 분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그러나 촌락에선 공동체적 관게가 여전히 작용했습니다.이 시기의 사회 계층은 귀족, 촌락의 일반민, 노비로 나뉘며 귀족은 노예와 토지, 재화 등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따로 가지면서 촌락 공동체를 대표하는 수장의 면모도 함께 가졌고, 노비는 상당수 존재했으나 많은 수의 노비를 사역하는 대규모 노예경영은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노예제 경영이 발달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화폐 경제의 발달, 도시의 번창과 같은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당시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산 활동을 담당한 이들은 촌락의 일반민으로 이들은 당시 농업이 지닌 낮은 생산력과 가뭄이나 홍수 등에 따른 생산의 불안정성 및 철제 농기구의 부족 등으로 인해 소농단위의 자립성을 유지할수 없었으며 촌락 단위로 상호 의존하여 생산과 소비생활을 하는 공동체적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