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국군의날이 10월1일로 정해진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승만은 1956년 9월 21일 육해공군 기념일에 관한 건을 폐지한다는 명을 내렸고 이 명령이 내리기 전까지 육해공군은 각각의 기념일이 따로 있었습니다.육군은 1946년 1월 15일 미군정 아래 조선국방경비대 1연대가 창설된 날을 기념 , 해군은 1945년 11월 11일 조선해안경비대의 근간이 된 해방병단의 창설일을 기념, 공군은 1949년 10월 1일 육군에서 분리된 날을 기념일로 정했습니다.그런데 육군이 1955년 기존 날짜 1월 15일에서 10월 2일로 변경 , 이유는 10월 2일이 유엔군이 작전명령 2호로 삼팔선 돌파를 공식 승인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0월 2일 육군의 날은 이듬해 바로 사라지는데 육군 제 3보병사단이 38선 위로 진격한 날짜가 10월 1일이라는게 새롭게 확인되자 이승만 정부는 국군의 날은 단기 4289년 10월 1일부터 시행한다며 1955년 제정한 육해공군 기념에 관한 건은 폐지한다 라고 밝히며 이때부터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지정해 기념해오고 있습니다.
Q. 올림픽의 시작과 그러한 활동이 갖는 의의는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근대 올림픽은 쿠베르탱 남작이 창시, 스포츠 매니아였던 쿠베르탱의 초기 구상은 전 세계인들이 모여 하는 것이 아닌 프랑스 청년들의 신체를 단련하고 국민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민족주의적인 발상이었습니다.당시 세계의 패권을 주름답잡던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투 패배로 시작된 부진과 보불 전쟁으로 국민 사기가 침체된 상황이었고 이런 사회 분위기는 프랑스의 국가주의와 애국주의 열풍을 몰고왔으며 이런 상황에서 쿠베르탱은 프랑스 몰락의 이유를 청년들의 신체 허약에서 찾게 되며, 신체 단련과 경쟁을 통한 청소년 교육을 강조하게 됩니다.국제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프랑스에만 국한되어있던 올림픽은 세계 청년들로 확대, 쿠베르탱은 스포츠 제전을 통해 세계 청년의 우정과 화합을 도모하자는 결론을 내리며 1894년 IOC를 조직, 1896년 제 1회 아테네 올림픽을 개최하게 됩니다.
Q. 우리나라 최초의 높이뛰기 선수 및 역사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에서 육상경기가 처음 시작된 것은 학교의 운동회부터이며, 1898년 5월 관립외국어학교 6개 분교 연합대운동회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에서 실시한 육상종목은 포환던지기, 100보 경주, 220보경주, 멀리뛰기, 높이 뛰기 등이었습니다.
Q. 조선시대 시장에서 식품이나 옷 등 재화 이외에도 무슨 종류의 상거래가 이루어졌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상거래 품목으로는 가죽은 유피, 피혁, 모피, 우피 등이었고 머리에 씌는 갓, 금, 나전칠기, 상투관, 망건, 관자, 풍잠, 살쩍밀이, 동곳, 갓끈, 광다회, 세조대 , 각대, 유기, 담배, 당목, 대구, 도자기 등이 있었습니다.
Q. 튀르키예,즉 돌궐은 실제로는 엄청난 나라였던데 자세히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튀르크의 음을 따 한자화한 말로 처음 철륵의 한 부족으로서 알타이산맥 방면에서 유연에 소속되었으며 그 중 한씨족인 아사나씨의 족장 토문이 유연, 철륵을 격파하고 독립해 일리가한이라 칭했습니다.이 무렵부터 그의 아우 디자불로스는 서방으로 진출, 3대 목간가한 때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협력해 에프탈을 멸망시켰고 그 결과 돌궐은 동쪽으로는 중국 둥베이,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에까지 세력이 미쳤으나 동족간의 다툼으로 583년 분열해 동돌궐은 몽골고원, 서돌궐은 중앙아시아를 지배했습니다. 동돌궐은 수나라 말기에서 당나라 초기에 걸친 중국 내부의 혼란을 틈타 중앙집권화를 도모해 그 세력이 강대해졌으나 당나라의 공격과 철륵 제부족의 독립 등으로 630년 멸망, 당나라의 간접 지배를 받았습니다.682년 다시 몽골고원에 독립국가를 세워 카파간가한 , 빌케가한 등이 등장, 그들은 한때 중앙아시아에 원정할 만큼 세력을 떨치나 다시 동족간의 다툼으로 쇠약해져 744년 철륵의 한 부족인 위구르에게 멸망했으며 서돌궐은 동로마 제국과 결탁해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토벌하기도 했으나 둘로 분열, 당나라는 이 틈을 이용해 이주, 서주 등의 주현을 설치하고 그 후 서돌궐은 한때 통일을 이룩하나 당은 657년 이를 토벌, 2명의 가한을 두어 통제했습니다. 7세기 말 돌기시가 일어나 이 두 가한을 추방함으로써 서돌궐은 멸망했습니다.돌궐의 국가는 일 이라 부르며 가한 밑에 소가한과 야부그, 샤드 등의 제후가 일봉의 봉건영지를 소유해 영내의 모든 부족을 통치, 이들은 베크 라는 지배계층을 구성, 일반 민중은 부둔 이라 했습니다.베크들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고 북아시아의 유목민족으로는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기록, 즉 돌궐비문을 남겼으며 일반적으로 원시적인 샤머니즘을 믿었으나 한때 불교가 가한을 중심으로 한 상급계층에서 유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