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이중섭 화가의 생애와 인생 이야기가 궁금한데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출생,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작고해 출생지인 평원을 떠나 외가였던 평양으로 가족 모두 거처를 옮겨 평안남도 평양에서 성장, 외조부는 평양 내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사업이 아주 번장했다고 하며 사업 종류가 일제시대에 꺼리낄 일이 없는 종류라 어릴 때부터 어려움은 전혀 모르고 편안한 유년시절을 보낸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 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 오산학교에서 서양화가인 임용련으로부터 미술 교육을 받은 이중섭은 본격적으로 미술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며 민족 정기에 대한 교육을 받은 이중섭은 일본에서 개최되는 미술전에 작품을 제출하게 되는데 오산학교 시절 민족교육의 영향을 크게 받아, 작품의 주제를 황소로 잡고 황소를 소묘하는 작품으로 참가하게 됩니다.당시 황소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황소라고 할 정도로 민족정서를 대표하는 동물이라 일본인들이 일부러 소에 관련된 표현자체를 못하게 하는 분위기였는데 이런 분위기를 보란듯이 비웃으며 작품을 그렸습니다.첫 작품이라 전시 때 비교적 그림 크기를 크게 그려내는 기조를 알면서도 손바닥만한 작은 크기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 소를 그린 그림을 본 일본의 한 기자는 이중섭의 천재성을 바로 알아보고 감탄했다고 하며 특히 소 그림의 낙관에 중섭 이 아닌 둥섭이라고 씌어있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는 당시 친일파로 변절한 조선인 문학가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게재한 머리를 중처럼 밀고 전쟁에 참가하는 아름다운 청년이 되자 라는 논조의 사설을 보고 중섭의 본인 이름에 발음이 같은 중자도 부르기 싫고 부끄러운 일이라며 분노해 낙관의 이름까지 바꿔 써낸 일화가 있습니다.1936년 일본 도쿄 데이코쿠 미술학교에 입학하지만 1937년 자유롭고 혁신적인 분위기의 학풍을 중시하는 도쿄 분카 학원으로 옮겨 졸업, 1941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조선인 화가 이쾌대, 진환, 최재덕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 1943년 자유미술가협회 특별상 태양상을 수상했습니다.1945년 고향인 평안남도 평원에 돌아왔으며 1945년 5월 원산에서 일본인 야마모토 이남덕과 결혼 이남덕은 이중섭을 분카 학원 유학시절에 만났고 1946년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로 근무하지만 1주일만에 사직, 같은 해 그의 친구인 구상 등이 펴낸 시즙 응향의 표지 제작을 맡았지만 응향이 퇴폐적, 반인민적, 반동주의적인 작품으로 규정된 필화 사건은 응향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습니다.1950년 한국전쟁 때 월남해 경상남도 부산, 통영, 제주도 등을 다니며 살았고 통영에서 지낼 때 이중섭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힘든 일생 중 그나마 가장 편안하고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올수있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지내는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이중섭은 그림 재료를 살 돈이 없어 담뱃갑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에 시달렸는데 이 때문에 1952년 부인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넘어갔고 그들의 만남은 1953년 이중섭이 부두 노동으로 번 돈으로 마련한 선원증을 통해 일본의 처갓집을 방문해 한 차례만 더 있었을 뿐입니다.그러나 선원증을 갖고 있던 이중섭은 일본에 오래 체류할수 없어 1주일만에 대한민국으로 귀환, 부산, 대구, 통영, 진주, 서울 등을 떠돌며 가난 속에 창작에 매달렸고 1955년 친구들의 도움으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시회를 미도백화점에서 열렸으며 서울에서 열린 전시회에 작품을 마흔가지도 넘게 전시하고 20점이나 판매하는 높은 성과를 거두지만 사기로 한 사람들이 전쟁 후 어려운 형편에 돈으로 주기로 한 작품료를 먹을 것으로 대신하거나 미루고 제대로 돈을 지급하지 않자 결국 손에 쥔 돈은 얼마 안되는 수고비 정도였다고 합니다.이중섭은 자신의 전시회를 도와준 동료와 선후배들에게 술이나 대접할 수 있는 정도의 수입만 갖게 되고 이로 인해 가족을 책임지지 못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에 빠지는데 그로 인해 이중섭은 거식증에 시달리면서 동시에 조현병 증세를 보이게 됩니다.1956년 간염으로 인해 서울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41세의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친구들이 수소문하여 이중섭을 찾았는데 이미 시신과 밀린 병원비 청구서만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Q. 국가마다 애국가가 생긴게 언제부터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부분의 국가는 국민국가가 형성되던 19세기 후반 이후 제정되었습니다. 중국의 경우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2년 톈한이 작사, 녜얼이 작곡한 것으로 49년 국가로 제정되었으며 미국의 국가는 1814년 영국-미국 전쟁 때 교섭을 위해 영국 군함을 방문했던 F.S. 키가 요새에 휘날리고 있던 성조기를 보고 감격해 시를 지은 것으로 곡은 영국의 J.S.스미스의 축배의 노래 을 이용, 19세기부터 애국가로서 불렸습니다.프랑스의 국가는 프랑스 혁명 직후인 1792년 4월 독일 등의 연합군이 프랑스를 침공하려 했을 때 알자스 지방의 스트라스부르에 주둔하고 있던 공병대위 루제 드 릴이 작사, 작곡한 행진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