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궁궐에서 일하던 내시의 서열은 어떻게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내시부는 종2품상선, 정3품 당상상온, 정3품 당하 상다, 종3품 상약, 정4품 상전, 종4품 상책, 정5품 상호, 종5품 상탕, 정6품 상세, 종6품 상촉, 정7품 상훤, 종 7품 상설, 정8품 상제, 종8품 상문, 정9품 상경, 종9품 상원, 소환으로 직책이 나뉘었습니다.이중 종 2품 상선은 내시부의 수장으로 기본적으로 임금의 수라를 책임지며 임금을 바로 옆에서 보좌하는 일을 했습니다.
Q. 소년 십자군 부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212년 성지탈환을 위해 프랑스와 독일의 소년, 소녀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십자군으로 알려져있어 소년십자군으로 불리나 실제 나이어린 소년, 소녀들로만 구성된 무리는 아니었으며 참가자들은 귀족이나 왕, 성직자가 아닌 무장하지 않은 평민들이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중세 때의 잦은 전쟁과 영주의 횡포로 토지를 잃거나 떠돌아다녔던 빈자들이었습니다.이들의 행렬은 조직화된 군대라기보다 장기간 벌어진 무력 전쟁으로 인해 가난해진 평민들의 불만이 표출된 재앙적 사건이었으나 이시기 일어난 민중봉기와 사람들 사이에 번진 과도한 종교적 광기가 당대 사건 등이 뒤섞이면서 소년십자군은 하나의 전설 , 사실처럼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이들이 모인 동기는 종교적인 열정, 기득권 세력인 귀족과 성직자 등으로 이루어진 십자군에 대한 불신, 사회 구조에 대한 불만, 경제적인 문제 등이 다양하게 작용했습니다.
Q. 1970년대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은 한국 내외에서 어떻게 대응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사건에 대해 대한민국 경찰은 표면상 의문의 세력에게 납치당한 자국 국민 김대중을 위해 수사를 하는 척 하긴 했으나 사실상 수사 은폐로 가닥을 잡고 진행, 애초에 경찰이 뭘 어떻게 할수도없는 게 세상 사람들 전부가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납치 사건임을 아는 상황이었고 서슬퍼런 유신체제에 대통령 측근을 일개 경찰들이 조사할수 있을리 없었습니다.사건 직후 박정희에 의해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했으나 말 그대로 표면적 조치에 불과, 수사 본수는 아무런 성과없이 1년 후인 1974년 8월 14일에 내사 중지, 다시 1년 후 1975년 7월 21일 내사 종결하며 그대로 묻혔습니다. 수사본부가 작성한 당시 수사자료를 보면 엄청난 수사범위를 수사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정작 찾은 증거는 없었고 당시 수사본부 부본부장이었던 당시 마포경찰서장 이흥세는 실제로 수사본부가 한수사는 형식상의 서류조사밖에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당시 여당인 공화당은 사건이 김대중의 자작극이 아니냐는 주장을 했으며 이에 대해 신민당 정일형 의원은 국회에서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에게 사건에 대해 질문하면서 무엇 때문에 한 정권이 개인을 상대로 하여 이토록 심한 피해망상증에 걸려있는지 알수없다며 강하게 비판하다 이에 항의하는 여당 의원들과 몸싸움을 벌였고 그 과정에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Q. 최초의 월드컵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 배경에는 어떤 역사적 사건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피파 월드컵은 1928년 당시 피파 회장이었던 쥘 리메가 국제적인 축구대회를 개최하기로 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피파는 20세기 초 당시 세계 최강의 영향력을 발휘하던 영국의 도움 없이 진정한 국제축구연맹으로 기능할수 없어 쥘 메리는 프로와 아마추어를 총망라한 세계축구선수권대회의 필요성을 꾸준히 역설함에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무엇보다 영국을 대표하는 잉글랜드와 다른 유럽 국가들 사이의 실력차가 너무 컸고 유럽과 다른 대륙들 사이의 실력차도 마찬가지여서 굳이 월드컵을 통해 진정한 세계 최고를 가릴 필요가 없었습니다.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은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에 변화를 주는데, 당시 유럽 국가들은 남미 국가들의 축구 수준을 노골적으로 무시, 유럽과 남미 사이에 좁힐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한다 생각했으며 그럼에도 남미의 우루과이가 프랑스, 네덜란드, 스위스를 연파하고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하게 됩니다.또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결승에서 격돌, 남미 국가들간의 금메달 쟁탈전이 벌어지고 재경기까지 가는 끝에 아르헨티나를 물리치고 올림픽 2연패에 성공한 우루과이는 유럽 사람들로부터 마법사들의 팀 이란 애칭으로 불리며 유럽은 더이상 남미 축구의 발전 속도를 간과할수 없게 됩니다.그럼에도 아마추어 대회인 올림픽 축구에 소극적이었던 잉글랜드는 프로선수들을 참가시킨다면 남미는 당연히 유럽의 상대가 될 수 없다 며 남미 축구의 강력함을 인정하지 않았고 줄 리메 회장은 이를 놓칠수 없는 기회로 간주, 올림픽 직후 암스테르담에서 피파 총회를 열며 프로 선수들까지 총동원하여 유럽과 남미의 힘을 제대로 겨뤄야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진정한 세계 축구선수권대회인 월드컵의 개최가 필요하다 주장합니다.같은 시기 IOC는 다음 대회인 1932년 LA올림픽의 정식 종목에서 축구를 제외시킨다는 방침을 피파에 통보했고, 이러한 이유로 줄 리메와 그를 지지하던 전 세계 축구인들은 월드컵 개최에 주저할 이유가 없게됩니다.제 1회 월드컵은 1930년 우루과이에서 개최, 우루과이 우승, 준우승은 아르헨티나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