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석굴암은 어떤 아름다움과 미적 가치를 지니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석굴암의 구조적 특색은 화강암의 자연석을 다듬어 인공적으로 축조한 석굴사찰이라는 점으로 이 같은 토목기술을 바탕으로 이룩된 석굴의 기본적인 평면구조는 전방후원의 형태를 취하며 네모진 공간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로 나뉩니다.주실에는 단독의 원각보존상을 비롯해 보살과 제사장 등이 있고 전실에는 인왕상과 사천왕상 등을 부조하여 배치, 이 전실의 기능은 곧 예배와 공양을 위한 장소입니다.천장은 궁륭형의 둥근양식으로 그 위에 연화문의 원판을 두어 천개로 삼으며 조각상의 배치는 전실부터 시작해 팔부신중 8구, 인왕 2구, 사천왕 4구, 천부 2구, 보살 3구, 나한 10구, 감불 8구와 본존여래좌상 1구가 있으며 이들 배치에 있어 두드러진 특징은 좌우가 대칭을 두는 것으로 이는 고대 조형미술의 기본원칙과 같은 것이기도 하여 석굴의 안정감을 강조하는 구실도 합니다.조각상 가운데 가장 중심을 이루는 것은 본존여래좌상으로 이 석굴 자체가 본존상을 봉양하기 위해 조영된 만큼 그 의미가 매우 크며 예배의 주대상이 곧 이 보존상임은 물론 중앙에 자리잡아 석굴의 내부공간을 구획한 신라 조각미술의 결정이며, 보존상은 연화문이 새겨진 대좌위에 결가부좌하고 있습니다.광배는 석굴 후벽의 천장 밑에 둥근 연화판석 1매로 조성, 이는 전실의 법당에서 본존상에 예배할 떄 동일시각 위에 놓여지는 치밀한 계산에 따라 처음부터 마련되었던 것입니다.본존상의 양식적 특징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7세기 후반부터 유행해 고려 전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여래좌상의 기본양식으로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 왼쪽 어깨가 가사를 걸친 우견편단양식을 보이며 수인은 악마의 유혹을 물리친다는 항마촉지인을 결 하고 있으며 머리 위에 육계를 표시, 머리는 나발 , 상호는 원만한 모습에 자비를 지니고 있습니다.신부는 매우 당당할 정도의 거구로 장부의 상을 보이며 목에 삼도가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두번째 손가락을 다음 손가락 위에 겹쳐 운동감을 주며, 왼손은 두 발 위에 놓아 편안한 자세를 보이며 본존상의 신앙적인 의미와 조형적인 가치가 훌륭히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부드러운 자태와 인자한 표정에서 고도의 조각술을 살피며, 이는 궁극적으로 불교의 구원상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Q. 비교적 현대에 발견 된 꽃들도 꽃말이 있던데 이 꽃말은 누가 짓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꽃말은 18세기 영국에서 유행했으며,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에서 꽃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생각에서 각각의 꽃에 어울리는 꽃말이 주어졌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꽃을 선물하고, 꽃을 받은 사람 또한 꽃 선물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는 세렘이라는 풍습이 생겼으며, 이는 각각의 의미를 꽃을 조합해 선물하면 편지가 되는 것입니다.18세기 1717년 영국의 메리 워틀린 몬태규와 1727년 프랑스 출신 오브리드 라 모레이레이가 각각 자신의 책에서 꽃말을 사람들에게 보급시켰습니다.
Q.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는 시기는 언제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에 가톨릭이 전해진 시기는 정확하게 설명이 어려우나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 등이 조선땅에 왔었고, 또 이 와중에 일부 조선인 포로들이 일본에서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기도했습니다.그러나 세스페데스 신부는 기본적으로 가톨릭을 믿는 일본군을 위해 잠깐 조선땅을 밟은 것일 뿐입니다.본격적으로 조선에 가톨릭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성호 이익과 안정복에 의해서였으며 이익은 본인이 천주교를 믿지 않았지만 학문의 입장에서 이해하려 노력, 안정복은 이후의 홍대용처럼 다소 비판적인 견기를 가지기도 하나 천주교 자체에 관심이 많았고 이들의 집안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생겼으며 영조시대인 1750년 황해도와 강원도 지방을 중심으로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