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이봉창 의사는 일제 강점기에 어떤 항일 활동을 펼치셨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봉창은 중국으로 건너가 김구가 만든 비밀 항일단체인 한인애국단에 가입, 자신이 나서 일왕을 암살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김구는 그의 굳은 의지를 확인 후 의거를 지원하기 위해 자금을 모으고 수류탄 2개를 구해줍니다. 이봉창은 1931년 12월 13일 안중근의 동생 집에서 의거를 위한 선서식을 가지고, 양 손에 수류탄을 들고 활짝 웃으며 기념촬영을 마친 뒤 의거를 실행하기 위해 일본의 도쿄로 갔으며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동경의 경시청 앞에서 궁성으로 향하는 일왕의 행차를 기다리다, 일왕 히로히토 일행이 도착하자 수류탄을 던지지만 일왕을 명중시키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일본 경찰에 붙잡히게 됩니다. 일본의 동경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같은 해 10월 10일 처형되었습니다.이봉창의 의거는 실패했지만 일본의 수도인 동경에서 일왕을 공격한 일은 놀랄 일이었고, 일본과 맞서고 있던 중국에서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으며, 당시 중국의 신문들은 이봉창의 거사 실패를 안타까워하며 우호적으로 보도, 이로 인해 중일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으며 당시 침체기를 맞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은 이봉창의 의거로 인해 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Q. 청나라 강희제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강희제는 청나라의 정치를 안정시키며 태평성대를 이루는데 기초를 다진 황제로, 아들 옹정제와 손자 건륭제까지 청나라의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재위 61년동안 백성들에게 성군으로 불렸습니다.특히 중국대륙의 이민족들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만주족과 한족의 동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한족의 사상인 유교사상을 장려해 국가를 통치했는데 만주족들이 한족에 동화되어 만주족 고유의 문화를 잃어버리는 폐단도있었습니다.강희제는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로 스스로 모범을 보이며 항상 공익을 우선했으나 후계자인 황세자 윤잉과 갈등을 빚어 역모사건이 일어나는 등 가족관계에서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해마다 범람하여 자연재해가 심했던 장강과 황하의 재방을 쌓아 방지, 외교적으로 대만과 몽골을 정복하고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북방의 경계를 안정화했습니다.강희제의 시호는 인황제, 묘호는 성조, 연호는 강희 이며 아들 35명, 딸 20명을 두었고 1722년 이궁 창춘원에서 69세로 사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