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대원군이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편 배경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말기 대원군은 이하응이 청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와 통상, 교류를 꺼려 강경한 쇄국정책을 펴냅니다.19세기 전반기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한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은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지를 구하기 위해 군함을 앞세워 아시아 각국을 침입, 영국은 1842년 아편전쟁으로 중국의 문호를 개방시키고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해 굴욕적인 북경조약을 맺습니다. 이러한 사태와 더불아 서양함선이 이양선의 잦은 출몰과 그들의 통상요구는 조선 위정자에게 위기의식을 갖게 합니다.이 같은 상황에서 당시 집권자인 대원군은 서양과의 교역을 엄금하고 나라의 문호를 걸어 잠그는 한편 열강의 앞잡이라 생각한 천주교에 대한 혹독한 탄압을 가해 이른바 병인박해를 불러 일으키고, 이 사건으로 프랑스인 신부 9명이 처형당함으로 프랑스 함대가 내침, 병인양요가 일어났으며 이어 미국상선 셔먼호 사건으로 71년 미국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군함 5척을 끌고와 신미양요가 일어납니다.대원군은 두 차례의 양요에서 양이를 물리치는데 성공, 크게 자신감을 얻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의 결의를 더욱 굳히게 됩니다.
Q. 팝 아트라는 미술장르는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5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는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가 최고치에 이르게 되며, 이와 더불어 사람들이 자연, 환경이 아니라 광고판, 대중매체와 친해지게 된 것에 착안해 추상주의에 식상함을 느낀 화가들이 티비나 잡지, 광고에 등장하는 이미지를 작품의 재료로 채택하게 되었습니다.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이나 도전보다 대중문화를 그림의 소재이자 정보로서 이용하는 중립적인 입장으로, 반예술을 지향하면서 신문의 만화, 상업 디자인, 영화의 스틸, 텔레비전 등 매스미디어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주제로 삼았습니다.
Q. 조선 초기의 관료였던 황희의 업적과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376년 음보로 복안궁녹사가 되었으며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에 합격, 1389년 문과에 급제 후 1390년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습니다.1392년 고려가 망하자 일정 기간 은둔생활을 하며 고려 유신으로 지냈으며 1394년 태조의 적극적인 출사 요청을 수용해 성균관학관에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를 겸임, 이후 직예문춘추관, 감찰 등을 역임했습니다.1398년 문하부우습유 재직 중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국사를 논의했다고 문책되어 경원교수로 편출되었다가 1398년 우습유로 소환, 이듬해 언사로 파직되었다가 그 해 2월 경 문하부우보궐에 복직됩니다.언사로 파직되었으며 곧 경기도도사를 거쳐 형조, 예조, 이조, 병조의 정랑을 역임, 1401년 경 지신사 박석명이 태종에게 천거해 도평의사사경력에 발탁, 그 뒤 병조의랑에 체직되었다가 1402년 아버지의 상으로 사직, 그 해 겨울 군기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기복되어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습니다. 1404년 우사간대부를 거쳐 승정원좌부대인에 오르고 이듬해 박석명의 후임으로 승정원지신사에 발탁되었습니다.1409년 참지의정부사가 되고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지의정부사, 대사헌을 지냈으며 1411년 병조판서, 1413년 예조판서 역임, 이듬해 질병으로 사직했다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습니다.1415년 이조판서 재직 중 송사 처리와 관련해 육조에 문책이 내려지며 파직, 그러나 그 해 행랑도감제조에 복위된 데 이어 참찬, 호조판서를 역임, 1416년 세자인 양녕대군의 실행을 옹호하다 파직되었습니다.그 뒤 조정으로 복귀해 공조판서가 되며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윤, 판한성부사를 역임, 1418년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 태종의 진노를 사서 교하로 유배되고, 남원부에 이치되었습니다.세종의 치세가 시작되고 아울러 태종의 노여움이 풀리며 1422년 남원에서 소환, 직첩과 과전을 환급받고 참찬으로 복직, 1423년 예조판서에 이어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구휼했으며 판우군도총제에 제수되며 강원도관찰사를 계속 겸대, 1424년 찬성, 이듬해 대사헌을 겸대, 1426년 이조판서와 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되며 판병조사를 겸대했습니다.1427년 좌의정 겸 판이조사가 되고 그 해 어머니 상으로 사직, 그 뒤 기복되어 다시 좌의정이 되며 이어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되어 약산성기를 답사, 이때 약산이 요충지라 해서 영변대도호부를 설치 후 평안도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했습니다.1430년 좌의정으로서 감목을 잘못해 국마 1000여필을 죽인 일로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의 일게 개입해 선처를 건의, 일국의 대신이 치죄에 개입함은 부당하며 사헌부에 개입하는 관례를 남기게 되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습니다.때문에 한때 파주 반구정에 은거, 1431년 다시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하기까지 18년동안 국정을 통리,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Q. 계유정난때 죽임을 당한 김종서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383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무관 김추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405년 문과에 급제, 1419년 사간원우정언으로 등용되고 이어 지평, 집의 , 우부대언을 지냈습니다.1433년 함길도도관찰사가 되어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에 출몰하는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고 6진을 설치해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성을 확장했으며 1435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를 겸직하면서 확장된 영토에 조선인을 정착시켰고 북방의 경계와 수비를 7년 동안 맡았습니다. 여진족들의 정세를 탐지, 보고하고 그에 대한 대비로 비변책을 지어 건의했습니다.세종의 명으로 변방에서 중앙의 관직을 맡았으며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대신으로 역할했으며 1440년 형조판서로 승진, 예조판서, 우참찬을 역임, 1449년 권제 등이 고친 고려사가 잘못되었다 하여 왕명으로 개찬하게 되자 춘추관지사로 총책임을 맡아 1451년 간행했습니다.그는 변방의 장수에서 역사서 편찬에도 능력을 발휘, 평안도도절제사를 거쳐 1450년 좌찬성으로 평안도도체찰사를 겸했으며 다음해 우의정에 오르고 1452년 세종실록의 총재관이 되었으며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감수하여 간행했습니다.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죽자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정분과 함께 좌의정으로서 문종의 마지막 유명을 받아 12세의 어린 단종을 보필, 대호라는 별호까지 붙은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명신이었으나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에 의해 1453년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되고 대역모반죄라는 누명을 쓰고 효시됨으로 계유정난의 첫 희생자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