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스탈린그라드 대공방전에서 양측 사상자는 모두 몇명이나 되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소비에트 연방은 총 사상자 1,129,619명 이며 전사 및 포로는 478, 741명, 부상 650,878명, 최소 4만명의 민간인 사망입니다.독일군 40만명, 루마니아 왕국군 20만명, 헝가리 왕국군 12만명, 이탈리아 왕국군 13만명으로 총 사상자 85만명 (포로 91000명 포함 ) 입니다.
Q. 이순신장군의 업적을 알고싶어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옥포해전, 합포 해전, 적진포 해전, 사천 해전, 당포해전, 율포해전, 한산도 해전, 안골포 해전, 장림포 해전 등이 있습니다.
Q. 하이든 교향곡의 특징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하이든의 교향곡은 명확한 음악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하이든은 3부 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소나타 형식을 개발, 그의 교향곡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형식을 중심으로 명확하고 뚜렷한 음악 주제와 섹션으로 구성됩니다.또 다이내믹 콘트라스트를 사용해 음악적 긴장과 해방을 만들어내는 대가로, 종종 조용하고 섬세한 악절에서 시끄럽고 활기찬 부분으로 음량과 강도의 변화를 특징으로 합니다.유머감각과 위트 , 기발함으로 음악을 주입하는 능력으로 유명, 예상치 못한 음악적 우여곡절과 유머러스한 음악적 몸짓과 효과를 특징으로 합니다.
Q. 세계 은 역사에 영향을 끼친 조선의 연은분리법이 조선에서는 어떻게 사용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연은분리법과 관련된 최초 기록은 연산군일기에 수록되어있는데 1503년 6월 13일 조에 김감불과 김검동이라는 사람이 개발해 시연했다고 알려져있고 연철을 화로에 녹여 은을 골라내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백성이 임금 앞에서 기예를 시연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일생에 한번 있기도 힘들었으나 정사인 실록에 기록된 것을 볼때 연은분리법이 조정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상당한 관심을 끌었던 기술이었음이 시사됩니다.연은분리법 시연을 본 연산군은 이제 은을 넉넉히 쓸수있다며 흡족해하고 닷새 뒤 조선 최대의 은광이 있는 함경도 단천에서 연은분리법으로 은을 캐도록 지시, 또 공조판서 정미수가 민간에 채굴을 허용하는 대신 세금을 내게하는 채은납세제와 행장을 발급하라 건의, 연산군은 이를 시행했고 당시 납부 금액은 채굴하는 한 사람당 1일에 은 1냥이었습니다.연은분리법은 이전에 중국에서 사용하던 회취법보다 더 효율적이었으며 더 많은 은을 산출할수있었고, 명나라의 실용서 천공개물 등에 소개되며 널리 퍼졌습니다.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물러나가고 중종이 즉위한 1506년 중종은 연산군 때의 사치풍조 척결을 내세우며 은광 채굴을 금지, 1507년 4월 연은분리법도 금지하는 방안을 강구해 보라는 왕의 지시가 내려지기도 했습니다.이후 몇몇 대신들은 재정 부양을 위해 민간에 은 채굴을 다시 허용하자고 요청해 민간에 은광 채굴이 일시 허용됩니다.1508년 단천에서 은이 많이 나는데 이걸 군민들이 무단으로 캐서 통사에게 팔고 통사가 이 은을 가지고 북경에 가지고 가는 일이 있다며 즉 은이 중국으로 유출되고있으니 이를 단속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며, 중종은 이를 단속할 강직한 사람을 보내 관리 감독하게 하고 단천의 은은 1년간 나라에서 사용할 분량만큼만 캐라는 전교를 내리기도 합니다.단천에서 나는 품질 좋은 은 때문에 여러 폐단이 나타나는데 은을 캐기 위해 깊게 파고 들어가다 구멍이 무너져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압사, 단천 현지에서는 납을 은으로 잘 정제해 보냈는데 이것이 덩어리의 형태로 가공될 때 일부 장인들이 그 안에 다른 것을 넣고 은을 겉에 씌워 유통하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에 무게를 따지는 것이니 덩어리로 만들지 말고 납작한 형태로 만들게 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으며 은이 단천에서만 나는 것은 아닌데 단천에서만 채굴하다보니 폐단이 크고 그곳의 백성들만 고통받고 있으니 다른 곳에서도 채굴 시험을 해보라 명하기도 합니다.그러자 은광 개발을 하던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전래된 유래에는 2가지 기록으로, 중종실록 종4품 판관으로 있던 유서종이라는 사람이 일본인을 끌어들여 연은분리법을 유출했다는 내용으로 유서종이 실록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 사간원이 왕에게 이른 내용입니다.사간원이 왕에게 이른 내용은 유서종 일가가 모반에 관여된 일이 있으므로 조관에 임명하기 합당하지 않다는 내용으로 조정에서 이 유서종이라는 사람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음이 드러나며 , 이어 2년 뒤 유서종이 왜인과 접선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사헌부가 유서종의 죄에 관한 첩보를 입수해 왕에게 고한 내용입니다.유서종이라는 관리는 가덕도에서 허가받지 않은 수렵으로 동래 현령에게 걸린 전과가 있으며, 서울에서 내려 온 큰손을 접대한 적도 있는 사람인데 이번에는 일본 사람을 위장전입시켜 거짓된 공을 쌓고자 했으니 중죄가 아닐수 없다 라고 보고한 것입니다.연은분리법은 당시로서는 아무나 할수 없는 고급기술이므로 이를 일본에 유출한 점은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이 시점에서 단천의 은도 거의 바닥이 난 상황이었고 이미 일본에서 들어온 은이 많아 결국 단천의 은은 채굴하지 말라는 명이 내려집니다.두번째는 일본의 긴잔큐키에 나오는 기록으로 일본에서 최초로 연은분리법을 시도했다는 이와미 은광에 전해지는 역사를 보면 1562년 하카타 출신 상인인 가미야 주테이가 은광을 발견했으며 조선에서 경수와 종단이라는 두 기술자를 초청해 이들로부터 연은분리법에 관한 기술이 전래되었다고 서술합니다. 은광석에 납이 다량으로 섞여 있던 이와미 은광에서 이 연은분리법 전래는 일본의 은 생산을 대량으로 증가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