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독일의 철혈재상이라 불리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독일 제국의 초대 총리로 독일 통일과 국가 발전에 큰 공적이 있습니다. 프로이센의 쇤하우젠에서 융커의 아들로 태어나 괴팅겐과 베를린 두 대학에서 공부 후 프로이센의 관리가 되었으며 호전적인 기질로 대학 시절 친구들과 싸움이 잦았고, 처음 맡은 베를린 법원 견습 서기직도 성격에 맞지 않아 자주 자리를 이탈했다고 합니다.1847년 독실한 신자였던 여성과 결혼하면서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독실한 신도가 되었고 내면의 변화가 시작되며 이후 프로이센 연방의회 의원이 되어 정계에 입문, 베를린의 3월 혁명때 반혁명파로 활약, 보수당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이 었습니다.혁명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 연방의회에 프로이센 대표로 임명되어 프랑크푸르트에 부임, 그는 처음에는 오스트리아와의 협조를 통한 독일의 통일을 주장했지만 결국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라 후에는 오스트리아와 자주 대립했습니다.1848년 전후에 보수적인 정치가에 불과했던 그는 러시아 주재대사, 프랑스 주재대사가 되면서 안목을 넓혔고 1862년 국왕 빌헬름 1세가 군비 확장 문제로 의회와 충돌하던 시기 프로이센 총리로 임명되었으며 그는 취임 첫 연설에서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서 결정된다 라고 선언하며 철혈정책의 의지를 밝혔습니다.그는 의회와 대립하면서도 독단으로 군비확장을 강행, 철의 수상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1864년, 1866년 두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북독일연방을 결성, 나아가 1870~1871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독일 통일을 이룩, 1871년 독일 제국 총리가 되어 1890년까지 이 지위를 독점했습니다.경제면에서 그는 보호관세 정책을 써 독일의 자본주의 발전을 도왔으나 정치면에서는 융커와 군부에 의한 전제적 제도를 그대로 남겨놓았고 통일 후 외교면에서 유럽의 평화 유지에 진력, 3제동맹, 독일-오스트리아동맹, 3국동맹, 이중보호조약 등 동맹과 협상관계를 체결하여 숙적이었던 프랑스를 고립시키려 했고, 독일의 국력을 신장시켜 그 지위를 높이려 했습니다. 한편, 그는 러시아0투르크 전쟁 후 베를린회의를 주재해 공정한 중재자의 역할도 했습니다.
Q. 보불전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직접적인 계기는 에스파냐 국왕 선출문제를 둘러싼 양국간의 분쟁이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엠스전보사건은 사건의 연출자인 비스마르크의 예견대로 프랑스와 프로이센 양 국민을 격양하게 하여 1870년 7월 19일 프랑스가 선전포고하나 군비가 우세한 프로이센은 북독일 연방제국뿐 아니라 남독일 제국의 지지까지 얻어 병력을 더 증강해 참모총장 몰트케의 작전에 따라 프랑스 국내로 들어갑니다.전황은 프로이센 독일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해 9월 2일 나폴레옹 3세는 독일군에게 항복,그러나 독일군은 계속 다시 진격해 파리를 포위, 파리에서 공화제 국방정부가 조직되어 프랑스 국민은 더욱 완강하게 독일군에 저항하나 9월 말 스트라스부르 , 10월 말 메츠 요새가 함락되어 파리도 1871년 1월 28일 성문을 열게 됩니다.2월 베르사유에서 평화협정, 5월 프랑크푸르트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는 독일에 배상금 50억 프랑을 지불, 알자스-로렌의 대부분을 할양, 파리 개성 직전인 1월 18일 베르사유에서 독일 제국의 성립이 선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