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고려 말의 임금이었던 공민왕의 업적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며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빼앗은 토지들을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개혁일 시행했으며,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자들도 양인으로 해방시켰습니다.또한 신진사대부들을 등용하면서 권문세족을 압박함으로써 반원정책을 실시했습니다.그 외에도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쌍성총관부 탈환, 요동지방 공략, 정방 혁파 등이 있습니다.
Q. 조선시대에도 남자들은 무조건 군대에 가야했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건국 직후에는 귀족 관료들이 거느리던 사병을 혁파해 공병으로 귀속시키는 일에 주력했고 태종 때 매듭지어지나 기왕의군대만으로 부족해 모든 양인은 군역을 지게 하는 양인개병제가 있었습니다.즉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양인남자는 군병이 되거나, 군병이 군역을 지는 동안 필요한 식량, 의복 등 경비를 부담하는 봉족 혹은 보인이 되도록했습니다.현직관료와 학생은 군역에서 면제, 왕의 친척인 종실과 외척, 공신이나 고급관료의 자제들의 군역은 국왕의 호위와 시종, 왕의 경비를 담당하는 고급특수부대에 소속되어 좋은 대우를 받았고 일반 평민은 정병, 유방군, 혹은 수군에 편입되어 정병은 1년에 두달, 유방군은 석달, 수군은 두달씩 복무, 복무기간에 따라 산계를 받았습니다.
Q. 조선 초기의 관료이자 학자였던 신숙주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438년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동시에 생원, 진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전농시직장이 되고 1441년 집현전부수찬을 역임했습니다. 1442년 국가에서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게 되자 서장관으로 뽑혔습니다.훈민정음을 창제할때 참가해 공적이 많으며 중국음을 훈민정음인 한글로 표기하기 위해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유배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으러 요동을 13차례 내왕했는데 언어학자인 황찬은 신숙주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했다고 전해집니다.1447년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집현전응교가 되고 1451년 명나라 사신 예검 등이 당도하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이해 장령, 집의를 거쳐, 직제학을 역임합니다.1452년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추천되어 수양대군과의 유대가 이때부터 특별하게 맺어지며 1453년 승정원동부승지에 오른 뒤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쳤습니다.같은 해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외직에 나가 있었고 수충협책정난공신 2등에 책훈되고 곧 도승지에 올랐습니다.1455년 수양대군 즉위 후 동덕좌익공신의 호를 받고 예문관대제학에 초배되어 고령군에 봉해졌으며 이어 주문사로 명나라에 가서 새 왕의 고명을 청하여 인준을 받아온 공으로 토전, 노비, 안마, 의복을 함께 받았습니다.1456년 병조판서로서 국방에 필요한 외교응대의 일을 위임받아 사실상 예조의 일을 전장하였으며 판중추원사가 되어 판병조사를 겸하고 우찬성이 되어서는 대사성을 맡았습니다.1457년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1459년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이 무렵 동북 방면에 야인의 잦은 침입으로 강경론을 폈고 1460년 강원, 함길도의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야인정벌을 위해 출정했으며 군사를 몇개 부대로 나누어 여러 길로 한꺼번에 진격하는 전략을 펴 야인의 소굴을 크게 소탕하고 개선했습니다.1462년 영의정부사가 되고 1464년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해 사직한 적이 있으며 1467년 다시 예조를 겸판했습니다.이듬해 예종이 즉위함에 유명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원상으로 서무를 참결, 같은 해 이른바 남이 옥사를 처리해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의 호를 받았으며 이듬해 겨울 예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에게 후사의 택정을 서두를 것을 건의해 대통의 승계에 공이 컸습니다.성종이 즉위함에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의 호를 받고 영의정에 다시 임명, 노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했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고 1472년 세조실록,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습니다.이어 세조때부터 작업 한 동국통감의 편찬을 성종의 명에 의해 신숙주의 집에서 총관, 세조 때 편찬하도록 명 받은 국조오례의 개찬, 산정을 위임받아 완성했으며 여러 나라의 음운에 밝아, 여러 역서를 편찬, 일본, 여진의 산천 요해를 표시한 지도를 만들었습니다.해동제국기를 지어 일본의 정치세력들의 강략, 병력의 다소, 영역의 원근, 풍속의 이동, 사선내왕의 절차, 우리측 관궤의 형식 등을 모두 기록해 일본과의 교빙에 도움이 되도록 했습니다.이러한 업적을 남기고 1475년 일생을 마쳤습니다.
Q. 조선 세종때 4군6진 개척 과정과 의의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종은 최윤덕과 이천을 연이어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 후 여진족을 몰아내도록 합니다. 후, 압록강 상류 지역에 4군을 설치, 최윤덕과 이천 등은 여연군, 자성군, 무창군, 우예군 등에 성을 쌓고 방어 진지를 만들었으며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삼아 동북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게 합니다.후, 두만강 하류 지역에 6진을 설치하는데 6진은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 등이며 4군과 함께 조선의 북쪽 국경을 이루게 되었고 4군 6진을 설치한 세종은 그 후 남쪽의 백성을 이주시켜 살도록 했습니다.
Q. 이징옥의 난이 일어나던 당시의 배경과 진행과정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징옥은 뛰어난 무장으로 관직 생활의 반 이상을 경원첨절제사, 경원절제사, 영북진절제사, 판경흥도호부사, 함길도 도절제사 등 함경도에서 보내면서 4군와 6진의 개척에 공을 남겼습니다.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 인 등을 죽이고 이어 이징옥을 김종서의 일당으로 몰아 파면하고 은밀히 그 후임으로 박호문을 보냈습니다.이징옥은 중앙에서 일어난 정변의 소식을 듣고 분개해 박호문을 죽이고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나가 종성에서 스스로 대금황제라 칭했고 도읍을 오국성에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에게 후원을 요청합니다.이징옥은 일찍이 여진족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여진족 사회에서의 명성을 의식하고 일이 여의치 못할때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을 배경으로 저항하려 한것이나 종성부사 정종, 호군 이행검 등에게 살해되어 계획은 실패합니다.
Q. 조선 세조때 남이라는 인물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본관은 의령으로 조선의 개국공신인 남재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남빈, 어머니는 남양 홍씨입니다.아버지인 남빈은 조선의 제 3대 왕인 태종의 딸 정선공주가 의산군 남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조선의 제 7대 왕인 세조에게 남이는 고종사촌의 아들인 셈입니다.남이는 13세 되던 해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고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권람의 딸과 결혼해 남구을금이라는 딸을 낳았으나 일찍 사별, 고성 이씨와 다시 혼인했으나 고부 간에 갈등이 심해 1468년 왕에게 아내와의 이혼을 허락받았습니다.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는 남이와 구성군 이준 등 젊은 종친들을 중용해 원로대신들을 견제하려 했고 남이는 세조가 1460년 무인들을 등용하기 위해 실시한 경진무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1466년 실시된 발영시에도 급제했습니다.1467년 김용달과 함께 포천, 영평 일대 도적떼의 토벌을 지휘, 그해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이준이 도총사가 되어 이끈 토벌군에 군관으로 참여, 진북장군 강순의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여 북청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그 일로 행 부호군이 되었으며 당상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후 행 호군이 되어 종성에 주둔하며 온성, 경원, 경흥 등의 고을을 다스렸으며 군공을 인정받아 적개공신 1등으로 포상되었습니다.1467년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고 이어 명의 요동군이 남만주 일대에 거주하는 건주여진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해오자 강순, 어유소와 함께 윤필상이 이끄는 북벌군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그해 음력 12월 27세의 나이로 공조판서가 되었고 왕궁의 호위를 담당하는 겸사복장의 지위를 겸했습니다.1468년 음력 5월 서현정에서 열린 연회에서 술에 취해 세조에게 이준만을 편애한다고 실언해 의금부의 감옥에 갇혔다가 다음날 풀려났으며 겸사복장의 지위에서 파직되었습니다.그해 7월 세조가 이준을 20대의 나이에 영의정으로 임명하면서 남이도 공조판서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의 지위를 겸하게 되었으며 8월 병조판서로 삼았지만 한계희 등 대신들의 반대로 9월 병조판서의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겸사복장이 되었으며 조부와 마찬가지로 의산군으로 봉해졌습니다.그러나 1468년 10월 병조참지 유자광의 고변으로 역모의 혐의를 받고, 그해 음력 10월 27일 강순, 변영수, 변자의 , 문효량 등과 함께 저자에서 거열형으로 처형, 그의 어머니도 다음날 거열형으로 처형되었으며 딸은 한명회의 노비가 되었으나 이듬해 외조부인 권람의 공이 참작되어 사면되었습니다. 남이는 1818년 음력 3월 10일 우의정 남공철의 청에 따라 강순과 함께 사면되어 관작이 복구되었고 1910년 충무의 시호가 추증,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남이의 묘소로 전해지는 남이장군 묘가 있고,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의 남이섬에도 그의 가묘와 추모비가 있습니다.
Q. 이시애의 난이 일어난 당시의 진행과정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조는 즉위하면서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해 북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고 경관으로 대체, 수령들에게 지방유지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의 감독을 강화하게 하여 출신인 수령들과 유향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회령부사를 지내다 상을 당해 관직을 사퇴한 이시애는 유향소의 불만, 불평과 백성의 지역감정에 편승해 아우 시합, 매부 이명효와 반역을 음모하고 1467년 5월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는 함길도의 절도사가 진장들과 함께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 고 선동하여 절도사 강효문 길주목사 설징신 등을 죽이고 방금 남도의 군대가 바다와 육지로 쳐올라와서 함길도 군민을 다 죽이려 한다 선동하자 흥분한 함길도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유향소를 중심으로 일어나 타도 출신 수령들을 살해 하는 등 함길도는 혼란스러워 집니다.또 그는 중앙에서도 병마절도사 강효문 등이 서울의 한명회, 신숙주 등과 결탁해 함길도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 모반하려 하여 민심이 흉흉하니 함길도 사람을 고을의 수령으로 삼기 바란다는 등 모략전술을 폈고 세조는 이에 속아 신숙주 등을 투옥했다가 곧 귀성군 준을 병마도총사로 삼아 토벌군을 출동시킵니다.이시애는 여진족까지 끌어들여 대항하나 허종, 강순, 어유소, 남이 등이 이끄는 3만 군대는 홍원, 북청을 돌파하고 이원의 만령에서 반란군 주력부대를 분쇄, 이시애는 길주를 거쳐 경성으로 퇴각하여 여진으로 도망치려 합니다. 당시 사옹별좌의 벼슬에 있던 이시애의 처조카 허유례는 자기 부친이 억지로 이시애의 일파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시애의 부하인 이운로 등을 설득해 이들과 함께 이시애 형제를 묶어 토벌군에게 인계합니다.8월 이시애 등이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목이 잘림으로 3개월에 걸쳐 함경도를 휩쓴 이시애의 난은 평정되었고, 이 난으로 길주는 길성현으로 강등 , 함길도는 남,북 2 도로 분리되었으며 유향소도 폐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