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왜이리 많은거죠?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과거부터 우리 민족은 타인을 의식하는 삶을 살았으며, 현재 우리들도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개인주의가 아닌 집단 속에서 타인을 의식하고, 타인에 대해 참견하며 우월감을 느끼기도 하기때문으로, 나와 다르거나, 생각, 의견이 다르면 틀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Q. 안사의 난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개원 말년 사회 안정이 지속되자 황제를 비롯해 관리들이 향락을 추구, 특히 현종은 귀비 양옥환을 총애하여 정치를 보살피지 않고 이임보와 양국충이 차례로 집권했으며 환관 고력사 등을 신임하여 정치는 날보 부패해갑니다. 또 천보 원년에 지방 열곳에 병진을 두고 장관을 절도사라고 불러 번진이 되었는데 이들이 정치, 군사, 재정 대권을 장악하나 절도사로 나간 사람이 그 임무를 마치고 중앙에 돌아오면 재상이 되므로 이임보는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 호족 출신을 등용해 절도사로 내보냅니다. 이로부터 당의 국력이 쇠퇴해 이를 천보의 쇠 라고 하며 당은 전성기에서 쇠퇴기로 바뀌게 됩니다.안록산은 호족 출신으로 이러한 이유로 절도사가 되었고, 세력을 키워 정치적으로 양국충과 대립, 그리하여 그는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천보 14년 반란을 일으킵니다.먼저 낙양을 점령하고 대연황제라 칭한 후 장안을 공격하자 현종은 창황히 사천으로 도망, 현종은 그 도중에 양귀비를 자살하게 하고 영무에서 숙종에게 양위해 이 난을 평정하도록 합니다.이때 안록산은 그의 아들 경서에게 살해되자, 삭방 절도사 곽자의가 회흘병을 이끌고 장안과 낙양을 수복, 이 토벌 작전에서 안록산의 부하 사사명이 귀순해 범양 절도사에 임명되었는데 안경서가 업으로 도망가 사사명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에 사사명은 안경서를 죽이고 스스로 대연황제라 칭하고 다시 낙양을 점령, 다행히 하동 절도사 이광필이 하양을 견고하게 지키고있어 그 세력의 확대는 막았습니다. 얼마 후 사사명도 그 아들 조의에게 살해되어 세력이 점차 약해졌으며 대종 광덕 원년에 사사명의 부하였던 전승사, 이회선이 당에 투항하고 사조의도 부하들의 압력 아래 자살해 8년에 걸친 안사의 난이 평정됩니다.
Q. 고려 말에 요승이라 불리던 신돈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돈은 본래 천민 출신이었으나 불자들 사이에 비범한 면이 있다 알려졌으며 김원명의 추천으로 공민왕에게 소개되었으며 공민왕과 여러차례 만나 수시로 정사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으며 공민왕은 신돈을 총명한 사람으로 판단했습니다. 1365년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청한거사 라는 호를 하사 받았고, 사부로서 국정에 참여하게 되며 그 공으로 진평후 라는 작위를 받았습니다.당시 고려 말 사회는 구 귀족, 권문세가의 세도를 비롯해 여러가지 사회제도가 매우 왜곡되어있었는데 권문세가의 전횡이 극심해 왕권이 위축되자 공민왕은 마친 원의 세력이 약화되어 가는 틈을 이용해 개혁정치를 추진, 밖으로는 원의 지배,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했고, 안으로는 원 세력의 힘을 등에 업고 세도를 부리는 권문세족을 척결하려 합니다.이때 왕의 신임을 받았던 신돈을 중용해 국내 개혁을 추진토록하며, 공민왕의 허락을 받아 가장 먼저 행한 것은 정계개편으로 기득권 세력을 몰아내고 이제현 등 새로운 신진사대부를 등용, 1366 고려의 토지와 백성을 바르게 개혁하는 관청인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개혁을 추진했습니다.권세가들이 부당하게 소유하던 토지를 원소유주나 농민에게 되돌려주고 억울하게 권세가의 노비가 된 사람들을 희망에 따라 자유화시키는 등 개혁정치를 했으며 1367년 성균관 중건으로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의 개혁적 성향의 신진사대부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실천할수 있었고 신돈은 불자이면서도 성리학과 유교를 숭상했습니다.이러한 개혁은 주로 권문세족을 표적으로 한 결과 그들의 힘을 약화시킴으로 왕권을 강화 회복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지며 이는 곧 국가의 기본 기강을 바로 잡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왜곡된 사회제도의 개혁은 온당하나 그 척결 대상이 된 권문세족들에게는 비난과 배척의 대상이 되며 그들은 점차 신돈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생존할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신돈은 권문세족의 저항을 받게 되는데 1366년 정추와 이존오가 그를 비판했고 1367년 그를 제거하려는 모의가 있었으며 1368년 김정, 김흥조, 김제안 등이 그를 제거하려다 발각되어 유해되었다가 신돈에 의해 살해됩니다.그러나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한 신돈은 지지기반이 없었고 그에게 아첨하는 자들이 늘 주변에 있으면서 신돈은 자기관리에 소홀해지며 돈과 여자에 관련된 추문이 이어졌고 기득권 세력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이러한 반대세력의 저항과 함께 국내외 정세도 신돈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공민왕도 신돈을 의심하기 시작, 1369년 5도의 도사심관이 되려 하나 공민왕이 거부했으며 개혁정치를 추진했음에도 민생문제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새롭게 등장한 명에서는 신돈의 집권을 비판, 결국 공민왕은 1370년 친정의 뜻을 밝히고 신돈 집권 시대는 끝이 납니다.얼마 뒤 이인이라는 자가 신돈이 역모를 획책한다는 투서를 재상이었던 김속명에게 보냈고 이 것을 보고하자 공민왕은 신돈과 관련자를 잡아들이고 이 사건으로 수원에 유폐되었다가 1371년 처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