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램브란트는 미술사에서 어떤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렘브란트는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네덜란드의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임은 물론, 유럽 미술사에서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특히 네덜란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다. 자의적으로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를 만들어내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를 능숙하게 사용한 스타일이 특징이며, 정교한 구도와 인물의 탁월한 묘사로 오묘한 인간의 감정을 담아내고자 했던 점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렘브란트는 명암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화가로, '빛과 어둠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붙었고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자화상을 무척 많이 그린 화가였는데, 100점 이상을 남겼다고 하며, 죽은 해인 1669년에도 자화상을 남겼다.오귀스트 로댕의 발언을 통해 렘브란트의 미술사에서의 위치와 영향력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나를 렘브란트와 비교하다니! 정말 신성모독이다! 예술의 거인 렘브란트! 우리는 렘브란트 앞에 엎드려야 하며 절대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Q.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서??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상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거의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 예술의 기반을 제시한 선구자 격 인물이자 인간이 도달 할 수 있는 극한의 지능을 가졌다고 평가 받는 인류 역사의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다.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 음악가, 공학자, 문학가, 해부학자, 지질학자, 천문학자, 식물학자, 역사가, 지리학자, 도시계획가, 집필가, 기술자, 요리사, 수학자, 의사 등 다방면에서 두루 활약한 다재다능한 천재이다. 심지어 키도 매우 크고 외모, 목소리도 매우 빼어났다고 한다.특히 걸출한 회화 작품들을 남겼으며, 대표작 , 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Q. 분단국가는 우리 나라밖에없는건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현재 우리나라와 북한 이외의 분단국가는 중국과 대만 그리고 키프로스와 북키프로스 튀르크 공화국이 있습니다.이전에 분단국가로서 현재 통일이 된 곳은 현재의 독일인 서독과 동독이 있었습니다.1945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 정권이 패망하고 독일은 패전국 신세가 되면서 엘자스-로트링겐,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등 많은 본국 영토를 주변국에 할양한 것도 모자라서 축소된 영토마저 연합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분할 점령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분할 점령하에서 통일된 정부 수립에 의견을 모은 미국, 영국, 프랑스와 달리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던 소련이 대립하여, 결국 통일된 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1949년 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지역에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소련 점령지역에 독일민주공화국(동독) 정권이 따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심지어 일정한 기준선을 따라 분할점령한 한반도와 달리 이쪽 지역은 4개국의 점령지가 뒤섞여있었기 때문에, 의견이 같았던 미영프의 점령지는 하나의 정부 관할로 통합됐지만 당시 소련의 점령지에 에워싸여 있던 베를린의 미영프 점령지도 서독의 관할에 들어가게 되면서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분할되어 두 개의 베를린 시청이 들어섰고, 냉전이 공고화되면서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이에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마셜 플랜 등 서방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발전한 서독과 달리 소련은 세계 전쟁의 원흉이었던 독일이 다시금 재기하지 못하도록 동독의 산업을 철저히 통제해 사실상의 농업국가화를 이루려 하면서 점차 낙후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했던 동독 주민은 나라를 등지고 다른 곳으로 탈출하는 등 국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그에 맞물려 동구권의 개혁, 개방 열풍속에 공산정권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커지면서, 동독 정부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동독이 아무리 공산체제를 유지하려 해도 주변의 모든 동유럽 국가들이 자유화되면서 체제를 유지하기가 극히 어렵게 되었습니다. 정 체제를 유지한다면 북한처럼 나라 전체를 거대한 감옥 수준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당시 동독 정부는 이런 무리수를 둘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1990년 10월 3일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하면서 분단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Q. 백제 패망후 의자왕은 중국에서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이것이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나당연합군에게 패배한 이후 의자왕은 왕후인 은고부인과 아들인 부여융, 부여효, 부여태, 부여연, 대좌평 사택천복 이하 신하 및 장수 93명과 백성 12,00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어 수도인 장안에 이르렀다. 660년 11월 1일 장안에 도착한 의자왕은 부여융을 비롯한 왕자 13명, 대좌평 사택천복과 국변성 등 37명 등과 함께 조당에 나아가 당고종과 측천무후를 만났다. 당고종은 이들의 잘못을 크게 꾸짖은 후에 이들 모두를 사면하였다. 그러나 의자왕은 나라를 잃고 나서 심한 충격을 받아 망국의 회한에 괴로워하며 며칠만에 머나먼 이역 땅에서 한 많은 죽음을 맞았다.
Q. 신라 황룡사 9층 탑은 아직도 실존 하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황룡사 9층 목탑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 대사의 요청으로 세워졌다.《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장 대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당나라에서 수행하던 중에 한 신인을 만났는데, 그 신인이 신라로 돌아가 9층의 불탑을 세우면 나라가 편안해질 것이라고 충고했다고 한다.이에 자장 대사가 선덕 여왕에게 청하여 탑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탑은 80미터에 달하는 매우 거대한 규모로 지었다. 모두 9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9개의 층은 신라 주변의 아홉 나라를 상징했다.이는 신라가 동북아시아에서 중심 나라로 발돋움하게 하려는 염원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후 황룡사 9층 목탑은 여러 차례 손질하여 고쳐가며 보전되었지만, 고려 고종 때인 1238년 몽골이 침입하여 황룡사가 불타 사라질 때 함께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