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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한정현 전문가
부산예술고등학교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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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사자 모양의 탈을 쓰는 사자춤이 왜 우리나라에 있나요?
동아시아의 사자춤은 불교의 전래와 함께 서역으로부터 유래했는데 아시아사자가 한 번도 서식한 적 없는 우리나라에서와 일본 그리고 중국에서도 서역의 영향으로 다양한 사자춤이 계승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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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랩이라는 장르는 정말 흑인이 먼저 만든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랩의 탄생은 DJ들로부터 비롯된다. 1970년대 미국, 특히 뉴욕시에는 Disco열풍이 불어서 많은 DJ들이 흑인빈민가 등지의 거리에서 댄스파티를 열곤 했다. 이들은 DJ Smokey, Kool DJ D같은 DJ들이었는데, 랩의 탄생에 큰 역할을 한 DJ는 바로 Kool DJ Herc였다. Kool DJ Herc는 다른 DJ들같이 Disco레코드를 틀어주는 대신,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R&B 또는 Funk Dance레코드를 주로 틀어주었다. 그런데, Herc가 특이했던 것이, 그는 노래를 트는 대신에, 간주부분(Break-beat)을 계속 반복하여 틀어주곤 했다. 그 간주부분에 사람들은 춤을 추기 시작 했고, 이들을 Herc는 “b-boys”, 또 그들이 추는 춤을 “b-boying”, 또는 “Break-Dancing”이라고 불렀다. 한편, Kool DJ Herc는 자신의 파티에 항상 MC를 데리고 다녔는데, Coke La Rock라는 이름의 이 MC의 역할은 음악 중간 중간에 마이크로 춤을 추는 사람들의 흥을 돋구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곧 “MC’ing”이었고, 나중에 “rapping” 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즉, 랩의 탄생이다. 참고로, 같은 시대에 DJ Hollywood 또한 Kool DJ Herc와 같은 스타일로 DJing을 했는데, 그는 자신이 MC역할도 했다.그런데, 그가 MCing을 하던 중, 반복했던 말들중 하나가 “..hip, hop..”이어서, “hip hop”이 랩을 지칭하는 표현들 중 하나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Herc의 뒤를 이어 많은 DJ들과 MC들이 Herc의 스타일 을 발전시키며 랩의 발전에 이바지 했다. 이들중에는 유명한 Afrika Bambaataa(아프리카어매리컨의 해방을 꿈꾸었던 라스파타리아니안)도 있어서, 그는 자신의 Zulu Nation을 형성 하여, 랩과 DJing을 발전시켰다. 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1970년대 후반, 1978년 Suger Hill Gang이 “Rapper’s Delight”란 첫 랩싱글을 발표하면서 부터이다.다음해에 Sequence는 “Funk You Up”이라는 노래로 랩을 더욱 대중화 시켰고, 1980년 Kurtis Blow는 “The Breaks”란 노래로 랩으로서는 첫 Gold를 기록했다.1982년에 Afrika Bambaataa는 그의 Soul Sonic Crew와 함께 “PlanetRock”을 시작으로 신디사이져와 드럼머신에 전적으로 의존하다시피 하는 Electro Funk 시대(그는 이러한 시도를 멀리 바다 건너 독일의 Kraftwerk의 스타일을 차용한 것인다. 그 당시 많은 이들은 Kraftwerk의 음악을 일종의 써커쓰 정도로 치부하고 있을 시기였다.)를 시작하였다. 특히 Afrika Bambaataa는 sampling을 그의 “Looking for the Perfect Beat”에서 처음 본격 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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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에 커피는 어떻게 유입되었을까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96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는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을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이며, 이때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로 커피를 접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고종은 덕수궁 안에 정관헌이라는 서양식 건물을 건립하고 그곳에서 커피를 즐겼다고 합니다. 커피를 당시 서양에서 들어온 국물이라 하여 '양탕국'이라 불렀으며, 손탁호텔은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하우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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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중국의 삼황오제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황오제란 중국 상고(上古) 시대(時代)의 신화적 성군(聖君)들을 총칭하는 말로 중국 역사의 기원이 되는 태고(太古)의 신비로운 시대 내지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삼황은 복희씨(伏羲氏)·수인씨(燧人氏)·신농씨(神農氏) 혹은 천황씨(天皇氏)·지황씨(地皇氏)·인황씨(人皇氏)의 3성군이고, 오제는 황제(黃帝)·전욱(顓頊)·제곡(帝嚳)·요(堯)·순(舜)의 5성군임. 수인씨 대신 축융씨(祝融氏)나 여와씨(女媧氏)를 꼽기도 하는데, 이들 대부분은 반인반수의 상서로운 외모를 지녔다고 합니다. 복희씨는 백성들에게 어렵(漁獵)과 목축을 가르치고 팔괘(八卦)를 만들었고, 수인씨는 화식(火食)하는 방법을, 신농씨는 농경과 교역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또 오제 중의 첫째인 황제는 배와 수레 만드는 법, 집 짓는 법, 옷감 짜는 법, 약초 이용법 등을 가르치고 문자와 악기를 발명했으며 중원(中原)의 다수 부족장들을 통합한 최초의 부족 국가를 건립했기 때문에 중국 민족(화하족(華夏族))의 시조이자 문명의 개조로 숭앙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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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 역사에서 중앙집권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앙집권제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다. 봉건국가에서는 왕권이 중앙집권국가의 왕권보다는 강하지 않다. 제후의 권력이 왕권보다 강해지거나, 군주가 제후들을 제어할 힘이 없어 제후들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는데도 막지 못하면 그야말로 군웅할거의 시대가 시작된다. 이렇게 되면 잦은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일본의 센코쿠 시대가 그러한 봉건제의 전쟁시대였다.중앙집권제하에서는 군주라는 가장 강력한 관리감독자가 버티고 있어 각 지역의 백성들이 과하게 수탈 당하는 일이 비교적 적다. 만일 지방의 관리가 백성들을 수탈하는 일이 생기면 중앙정부에서 암행어사 같은 감시인을 보내 파직할 수도 있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견제수단이 존재했다.한국사의 국가 발전 단계는 성읍국가(군장국가) 다음이 연맹왕국, 다음이 중앙집권국가라고 보는데, 성읍국가 중에서도 연맹왕국이 되지 못한 국가들은 결국 도태되고, 연맹왕국 중에서도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국가는 또 도태되어 최종적으로 중앙집권국가가 된 고구려, 백제, 신라 만이 삼국시대를 이루었다. 대표적으로 부여와 가야는 연맹왕국 단계에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멸망했다.고구려, 백제는 4세기경부터, 신라는 5세기경부터 지방관을 파견했다. 백제의 22담로제도 바로 그런 것이다.이처럼 한민족 국가는 4세기경부터 이미 중앙집권제가 자리잡았지만 8세기경부터 통일신라의 왕권이 급격히 무너지면서 신라는 도시국가 수준으로 줄어들고, 나머지 지역은 성주를 자처하는 호족들이 일어나 자기 근거지를 직접 다스리면서 봉건국가가 되어버린다.이런 난국을 통일한 고려도 사실상 지방은 호족이 다스리는 봉건제 비슷하게 굴러갔다. 관료에게 봉토를 분봉하고 수조권을 준 것이다. 그러나 고려 말, 이성계를 위시한 신진사대부는 토지개혁을 이루어 과전법을 도입, 관품에 따라 경기도의 토지에 한하여 수조권을 부여한 것이다.조선이 개창된 후에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고, 세조 때에는 재직 중인 관료에게만 주는 직전법, 성종 때에는 국가에서 직접 수취하여 나눠주는 관수관급제가 도입되었다.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1948년 제헌 헌법에서는 지방자치를 명시해두었으나, 지방의회에 한하여 직접민주주의를 시행한 것이었고, 시장, 교육감 등은 중앙정부에서 파견하였다. 그랬다가 5.16 군사정변 이후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발동하여 지방자치는 통일 이후에 시행한다고 미뤘다.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지며 드디어 지방자치 시대가 열렸고 현재 서울특별시장, 광역시장, 도지사, 시장, 군수, 교육감은 모두 지역민들이 뽑는 민선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중앙정부의 힘이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이다. 북한은 당연히 아직도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이다. 문제는 한국과 북한은 중앙집권제로 인한 폐단이 심각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다보니 한국 내에서도 중앙집권에 대한 비판이 많으며 개혁의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반대로 지방자치제의 폐단과 비효율에 대한 반발로 더 강하게 중앙집권할것을 주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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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독일 나치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정식 명칭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NSDAP)이다. 나치스란 원래 정적(政敵)들이 만들어 낸, 얕잡아 부른 명칭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이 말이 전세계의 통칭이 되었다.19세기 말엽 유럽에 일반적으로 공통되어 있던 반(反)유대주의 ·백색인종지상주의·국가주의·제국주의 및 반(反)사회주의와 반(反)민주주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발생하였다.중심이론은 독일민족지상주의와 인종론이다. 즉, 게르만족은 인류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종족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을 지배할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이와 반대로 가장 열등하고 해악적인 인종은 유대인으로, 그들은 아무리 환경을 개선하고 교육을 실시하더라도 그들의 천성적인 열등성과 해악성은 개선되지 않으며, 항상 주위환경을 부패시키거나 또는 해악을 만연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우수한 민족은 그들의 열악성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을 격리시키거나 또는 절멸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본래 나치스의 근본사상은 국가주의적 경향, 중산계급과 지식인의 반민주주의적 ·권위주의적·민족주의적 경향, 특히 군부·관료·경영진·교회·교육계 등 사회 일반에 통하는 권위주의적· 군국주의적 전통과 강렬한 국가주의 사상이었고, 나치스의 지지자로서는 항상 몰락의 위협을 받고 있던 중산계급이 중심이었으며, 거기에 다시 군인으로 복원된 병사·장교와 중소농민, 노동조합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 ·점원 ·실업자 등이 참가하여 나치스의 대중적 기초를 이루었다. 또한, 대자본가층이나 보수파 및 군부 등도 나치스와 공통의 목적, 즉 계급투쟁의 배격, 강대한 독일의 건설, 군비의 대확장과 군국주의적 국가건설, 독재정치의 수립, 경제발전, 민주공화제의 전복, 독일의 유럽 제패 등의 주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치스를 지지하였다.1919년 1월 안톤 드렉슬러에 의하여 독일노동자당이 결성되고, 1920년 2월 24일 대중집회를 열어 25개조의 당강령을 공포하였다. 1921년 7월 임시 당대회에서 히틀러의 독재적인 지위가 확립되었고, 당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 국내의 혼란을 틈타 남부독일의 바이에른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그것은 바이에른의 군부와 보수왕당파 및 대자본가 등이 후원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힘입은 히틀러는 1923년 11월 8일 바이에른 보수왕당파와 군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독재제도를 수립하려고 공화정부와 맞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때는 시기가 일러 군부 ·경찰 ·관료 등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으며, 이로 인하여 당도 한때 금지당하기까지 하였다.그러나 당은 1925년 2월 재건되었으며, 그후 히틀러는 합법주의를 지키면서 히틀러-유겐트(Hitler-Jugend:나치스청년단) ·나치스학생동맹 ·나치스돌격대(SA) 등 대중조직을 발전시켜 독일의 국민적 전통과 민족주의적 풍조에 합치하는 대중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특히 사회주의적 슬로건을 강조하였다. 세계적 경제공황의 혼란기에 국민의 다수가 나치스의 힘에 의하여 강대한 독일을 재건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지지를 받아 독일의 제1당이 되었다. 이때부터 군부와 대자본가, 각종 압력단체 ·관료층 및 농업계까지도 나치스를 지지하게 되었으며, 진정한 뜻으로의 반(反)나치스파로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청년부 등 극소수에 불과하였다.이와 같은 상황 하에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마침내 합법적인 총리로 임명되어 독일 제3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독일의 관료층 ·군부층 ·경영진 ·압력단체 등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나치스의 정권획득은 기정사실이 된 것을 의미하였다. 국내 각 방면 유력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은 히틀러는 보다 강력하게 경제적 ·정치적 시책을 감행하여 나갔다. 1933년 초 600만 명을 넘었던 실업자들을 군수산업과 토목사업에 거의 흡수시켰으며, 농업면에서는 세습농장법을 제정하여 대농과 중농을 보호하였고, 또한 식량의 자급자족화를 도모하였다. 공업면에서는 인조석유 ·인조고무를 비롯하여 대용품 생산에 힘을 기울였으며, 종래의 노동조합을 폐지시키고 노동자를 자본가 ·기술자 등과 함께 새로 조직된 독일노동전선에 가입하게 하였다. 정치면에서는 1당독재를 실시하였으며, 나치스친위대(SS)를 강화하고, 비밀경찰로 하여금 정보를 위한 기관으로서 전국민을 감시하게 하였다. 또한 유대인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를 강제수용소에 수용시켜 혹독한 학대와 살육을 자행하였다. 교회 ·군대 ·학교 등도 나치스식으로 획일화시키고 일반 국민도 나치스 신봉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반(反)나치스 저항운동은 1936년이 되자 거의 그 자취를 감추었다.국제관계에서는 1933년 10월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1935년 1월 자르지방의 인민투표에서 승리하여 이 지방을 독일영토로 복귀시켰으며, 3월 국민징병제를 채용 ·실시하여 육군을 일시에 5배로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6월에는 영국-독일해군협정 체결에 의해서 해군도 4배로 증강하였다. 1936년 3월 독일군을 라인 비무장지대로 진주시켜 독일-프랑스 국경지대를 요새화하였다. 이처럼 독일의 실력이 유럽세계를 제압하게 되자 독일국민의 나치스에 대한 신뢰도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실력을 배경으로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강제적으로 독일에 병합시키고, 10월 체코의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합병시켰으며, 이어 1939년 3월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정복하여 독일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히틀러는 여세를 몰아, 9월 폴란드에 단치히 자유시(自由市)를 독일에 반환할 것과 동(東)프로이센과 독일 본토를 연결하기 위하여 폴란드령 포메른을 경유하는 치외법권적인 도로와 철도의 건설을 인가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폴란드로부터 거절당하였기 때문에 폴란드 침입을 감행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히틀러의 나치스는 폴란드와 구소련을 멸망시키고 그 지방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종족인 게르만족의 생존권(生存圈)으로 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었다. 나치스는 1945년 패전으로 연합군에 의하여 금지되고, 그 금지조치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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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대시대의 서옥제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서옥제란 고구려의 혼인 제도로 사위집을 뜻하는 서옥은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처음 나오는 말이다. 동이전 고구려조에 따르면 ‘처음 말로써 혼인을 정하고, 다음에 여자의 집 대옥(大屋) 뒤에 소옥(小屋)을 지어 서옥이라 부른다. 저녁에 사위가 여자 집에 와서 문 밖에서 자기의 이름을 알리고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 여자와 잘 것을 세 번 원하면 여자의 부모는 이것을 듣고 소옥에서 잘 것을 허락한다. 남자는 다음날 떠날 때 전백을 놓고 간다. 여자는 자녀를 낳고 자녀가 성장한 뒤에야 남자의 집에 살러간다’라고 하였다.위지동이전에 나오는 이같은 제도에 대해 데릴사위제 또는 봉사혼(奉仕婚)으로 보기도 한다. 이 제도는 일반적으로 데릴사위제로 해석하고 있으나, 동이전의 기록으로 볼 때 남자는 여자집에서 계속 사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만 살 뿐 아니라, 여자도 자녀가 성장하면 남자집으로 오기 때문에 데릴사위제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고구려의 서옥제는 결혼식을 올린 여자가 자기 집에 머물러 있고 남자가 몇 번 처가에 살러 가는 풍속인 해묵이(신부가 혼례 후 몇 해가 지나 신랑 집으로 가는 것)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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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쿠빌라이는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나요?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이자 원나라의 초대 황제. 사실상 통일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이후에는 원나라가 시작된다.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칸호는 세첸 칸, 휘는 보르지긴 쿠빌라이이다. 휘의 어원은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백조를 뜻하는 튀르크어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자'라는 중세 몽골어 어휘가 어원이라는 설도 있다.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칭기즈 칸의 막내적자인 툴루이의 4남이자 전대 대칸이었던 몽케 칸의 친동생이다. 그리고 제국대장공주의 아버지이며 고려 원종의 사돈, 충렬왕의 장인, 충선왕의 외할아버지, 계국대장공주와 복국장공주의 증조할아버지, 조국장공주의 고조할아버지이기도 하다. 또한 덕녕공주는 쿠빌라이 칸의 4세손이 된다.1260년, 대칸의 자리에 올라 대칸의 자리를 두고 동생 아리크부카와 내전을 벌여 1264년에 이겼다. 그러나 내전 이후 친(親) 아리크부카 세력이 떨어져 나가서 쿠빌라이의 직접적인 통치권은 중국과 몽골 초원에만 머물렀다. 그러나 쿠빌라이 칸의 치세에 몽골족의 전체 판도는 역사상 최대 규모에 달했다. 무려 전 세계 인간이 거주 가능한 지역의 1/5을 차지했다. 그리고 몽골 제국의 대규모 원정은 쿠빌라이 칸의 시대를 마지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동시대의 마르코 폴로 덕분에 칭기즈 칸 못지 않게 서구 세계가 잘 아는 몽골 제국의 군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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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명함을 만들어 주고받는 문화는 언제부터 행해졌을까요?
최초의 명함은 고대 중국에서 대나무를 잘라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걸 명자라 불렀다. 주연의 묘에서도 대나무 명함이 출토되었다. 각 국가마다 명함의 크기와 사이즈가 다르며 디자인도 각양각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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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에서 처음 단발령이 내렸을때 백성들의 반응은 어땠었나요
김홍집 내각(金弘集內閣)은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내정개혁에 주력하였는데, 조선 개국 504년 11월 15일 건양원년(建陽元年) 1월 1일을 기하여 양력을 채용하는 동시에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일본의 강요로 고종이 먼저 서양식으로 머리를 깎았으며, 내부대신(內部大臣) 유길준(兪吉濬)은 고시(告示)를 내려 관리들로 하여금 가위를 들고 거리나 성문 등에서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깎게 하였다.조선에는 머리를 소중히 여기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毁傷)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유교의 가르침에서 유래된 것이다. 많은 선비들은 ‘손발은 자를지언정 두발(頭髮)을 자를 수는 없다’고 분개하여 정부가 강행하려는 단발령에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더구나 김홍집 내각은 이른바 친일내각이라는 소리를 듣는 형편이었으므로, 음력폐지·단발령 등은 모두 배후에서 일인(日人)이 조종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을미사변 이후 배일적(排日的)이 된 국민감정을 무시하고 개혁을 단행하였으므로, 국민은 더욱 분개하여 단발령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의병을 일으켜서 정부시책에 대항하였다. 정부에서는 친위대(親衛隊)를 파견하여 의병활동을 진압시켰으나, 김홍집 내각은 무너졌고 김홍집도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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