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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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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 전문가
부산예술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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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제주도 돌담의 유래와 강한 바람에도 견디는 원인은 뭘까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을 얼기설기 쌓아 놓았기 때문에 바람이 잘 빠져 나갈 수 있고 직선으로 쌓지 않고 곡선으로 쌓아놓아 물리적인 힘을 가하지 않는 한 왠만한 태풍에도 잘 쓰러지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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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사산조 페르시아가 오늘 날에 이란으로 보면 되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산 왕조란 말 그대로 왕가인 사산 가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대에 쓰인 국호는 'Ērānshahr'였는데, 파흘라비어(중세 페르시아어)로 '아리아인/이란인의(Ērān) 영역(shahr)'이라는 뜻이다. 이는 오늘날 '이란'의 어원이기도 하므로, 사산 왕조의 역사는 이란의 민족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슬람교의 도래 이후 페르시아인들이 정치-군사 부문에서 주도권을 잃고 아랍인에서 튀르크인, 몽골인 등 수많은 이민족들이 유입되었지만, 사산 왕조 시대에 형성된 이란이라는 강력한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페르시아 문화는 전근대 시대 내내 서아시아 지역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누렸으므로, 사산 왕조의 역사적 중요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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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대 슬라브족의 이동의 원인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4~5세기 무렵 이웃의 게르만족이 쇠락해가는 로마 제국 하의 서유럽으로 대거 이주하자, 슬라브인들은 이웃이 떠난 바로 그 자리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서쪽으로 이동하다 6세기에 동로마 제국 국경인 다뉴브 강에 다다랐다. 다뉴브강 남쪽의 주인인 동로마가 동고트 왕국, 반달 왕국 및 사산 왕조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이들은 아바르 칸국의 산하에 놓여 아바르족과 함께 다뉴브 강을 넘어 로마인들의 땅인 발칸 반도를 습격하였다. 그 중에서도 순수 유목민인 아바르족은 적당히 약탈을 하고 다시 다뉴브 강을 넘어 돌아갔지만, 순수 유목민은 아니었던 슬라브족 중 일부는 아예 발칸 반도에 정착해서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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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처칠이 영국에서 영웅이지만 왜 인도에선 욕을 먹나요?
1943년 인도 벵골에는 인도 역사상 최악의 기근이 발생해 700만명이 아사했습니다.얼마 후 당시 인도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의 비밀문서가 발견됐고, 이 문서에는 영국군의 쌀 수탈 정책이 대기근을 불러왔다고 적혀 있었습니다.그리고 그 쌀 수탈 정책을 지시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바로 처칠이었습니다. 1942년 세계 2차 대전 당시 미얀마에서 일본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영국은 일본에게 미얀마를 뺏기고 말았습니다. 이에 처칠은 일본이 쳐들어와도 보급품의 부족으로 내륙까지 진입할 수 없도록 묘책을 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쌀 수탈 정책이었던 것입니다.이후 영국은 해당 사실을 담은 공식 회의록이나 보고서를 모두 폐기했습니다. 이로써 벵골 대기근은 자연재해로 인한 참사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2010년 역사학자 무케르지는 저서 '처칠의 비밀전쟁'을 통해 이 사실을 모두 폭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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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수나라 침공 30만 대군은 객관적으로 근거가 충분한가요
598년 고구려의 선제공격에 분노한 수 문제는 넷째 아들 한왕漢王 양량楊諒과 강남의 진陳나라 평정에 공을 세운 왕세적王世積에게 육군과 수군 30만 군사를 주어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영양태왕 9년에 벌어진 제1차 고수高隋대전, 임유관臨楡關대첩입니다. 기세 좋게 출병한 수나라 30만 대군은 죽은 자가 10명 중에 8~9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처절한 패배를 당했습니다. 전쟁의 경과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패배 이유를 육군은 장마를 만나 군량의 수송이 끊어지고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이며, 수군은 폭풍을 만나 병선兵船을 많이 잃어버려서 철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양태왕은 수의 침략을 두려워해서 사신을 보내 사죄하는 표문을 올렸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수나라의 처참한 패전을 감추기 위한 왜곡 날조의 기록입니다.제1차 고수대전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고구려 영양태왕의 작전에 말려들어 수나라 30만 대군은 전멸하였습니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는 이때의 전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견이 또다시 양량, 왕세적 등 30만 명을 보내 전쟁할 때, 겨우 정주定州를 출발하여 요택에 이르기도 전에 물난리를 만나 군량 수송이 끊기고 유행병이 크게 번졌다. 주라구周羅緱가 병력을 동원하여 등주登州를 점거하고, 전함 수백 척을 징집하여 동래東萊에서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향하다가 아군에게 발각되었다. 주라구가 후진後陣을 맡아 막으면서 전진하다가, 문득 큰바람을 만나 전군이 표류하다 빠져 죽었다. 이때 백제가 수나라 군대에게 길을 인도해 주겠다고 제의하였으나, 고구려에서 은밀히 타이르자 실행하지 못하였다.”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요서를 공략하던 앞선 말갈의 군사들이 요서총관 위충과 접전을 벌이다 거짓으로 패한 척하며 임유관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임유관 일대를 초토화시켰습니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수 문제는 양양과 왕세적에게 30만 대군을 보내 그들을 뒤쫓게 하는데 여기에 수군총관 주라구의 군대까지 따라붙게 하였습니다. 주라구는 일부러 거짓말을 퍼뜨려 군대를 평양으로 몰아가는 척 수를 쓰다가 양양의 군대에 보급품을 대 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강이식 도원수의 군대는 바로 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주라구의 군대를 격파시켰습니다. 주라구의 군대를 무너뜨린 뒤 강이식 장군은 성책을 굳건히 지키되, 별도의 영이 내려질 때까지는 절대로 나아가 싸우지 말게 하였습니다. 양양이 거느린 수나라의 주력 군대를 상대하기 위한 다음 작전은 ‘싸우지 않고 힘 빼기’였습니다. 고구려군은 성城안 깊숙이 진을 치고 들어앉아 수비에만 집중하는 전략을 썼습니다. 아마도 이때 조의선인들이 후방에서 교란과 함께 수군의 보급로를 끊는 활동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양양이 이끄는 수나라 대군은 요하 하류인 요택遼澤에서 포위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요택은 『환단고기』에 따르면 “황하 북류 동쪽”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훗날 당 태종이 이끄는 당군唐軍이 괴멸을 당한 곳입니다. 보급로는 끊긴 데다가 장마철에 전염병까지 도는 바람에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가 된 수나라 진영에서는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 가는 병사들이 속출하자, 퇴각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때를 기다리던 강이식 장군 휘하 고구려군은 그들을 뒤쫓아 가서 완전히 섬멸하고 위풍당당하게 도성으로 개선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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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춘추전국시대가 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춘추전국시대란 기원전 770년경 주나라가 견융의 공격을 받아 천도 한 뒤(동주시대)부터 기원전 221년 진(秦)에 의해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이 건국될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통일 진나라가 등장하기 전이라고 해서 선진시대(先秦時代)라고도 부른다.중국을 형성한 시대. 즉 수천수백년 후, 심지어 현대까지도 이어지는 중국의 근간들인 여러 이념과 제도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다. 이 시대에 다져진 것들이 진한 시대를 거쳐 하나의 중국으로 융합되어 지금까지도 중국이라는 거대한 문명권이 하나의 제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7개 내외의 국가와 그 외의 수많은 소국들이 천하를 두고 쟁패했던 군웅할거의 시기로, 부족 및 도시 국가 수준의 문명이 치열한 경쟁에 휘말리며 사회 각 분야에서 빠른 발전을 겪으며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변신한 시기이며, 이와 같은 역동적 사회의 변화에 대한 고민으로 사상적, 학문적 변화 역시 두드러졌던 시기이다. 이에 따라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이념과 제도들이 본격적으로 출현했던 시기로 볼 수 있으며, 이 시기 동안 축적된 문명적 진보와 변화는 이후 진한시대를 거치며 확립된 대략적인 중화권, 더 나아가 동아시아 문명권의 기반이 되었다. 이전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전설로 여겨지는 하나라를 제외하고도 상나라(은나라), 주나라의 경우 시대적 구분으로는 단일 국가로 구분되고 있지만 이는 춘추전국시대 이후의 중국 역사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 국가들은 실제로 성읍 국가 수준에 머물렀고, 이들의 힘과 영향력을 인정해 명목상의 종주권을 인정한 국가들은 있었으나, 이들 국가도 자치권을 행사하며 실질적으로 독립된 통치를 했기 때문에 사실상 다른나라나 마찬가지였다. 즉 이 시대에는 주도권을 잡던 패권국이라고 해도 크고 아름다운 영토를 바탕으로 한 국가라기보다는 도시국가의 형태에 보다 가까운 수준에 머물렀다. 따라서 상, 주를 이후의 통일 왕조와 같은 크고 아름다운 영토를 지닌채 확고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었고 후대의 삼한이나 신성로마제국과 비슷하게 명목상 영토의 일부분만을 직할 통치하는 형태였다. 이런 점에서 춘추전국시대는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가 발생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영역의 측면에서도 춘추전국시대는 장강 이남이 중국 역사상 최초로 본격적으로 포함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상, 주 시기에는 이 지역이 중국 문화권에 포함되었다고 하기 어려웠지만, 이 시기는 장강 이남의 제후국들이 본격적으로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것에서 나타나듯이 중국 문명권의 영역 확장이 발생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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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세계 각국의 언어가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전 세계 언어가 다른 이유는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발생합니다. 첫 번째 요인은 지리적인 요소입니다.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지역은 자연환경, 거주민의 생활 습관, 문화 등이 서로 달라지기 때문에 언어도 다른 언어로 발전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대륙에는 서식하는 동물들이 많아 그 지역 주민들은 많은 종류의 동물 이름을 알아야 했으며, 이로 인해 아프리카 대부분의 언어는 동물 이름이 많이 사용됩니다.두 번째 요인은 문화적인 요소입니다. 언어는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문화 요소에 따라 다른 언어가 발전했습니다. 각각의 문화는 자신만의 신화, 전설, 종교등을 가지고 있어 그것이 언어에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중국어는 대부분의 언어 보다 네이티브 발음이 높은 편이지만, 중국어는 각 글자가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같은 발음의 단어가 여러개 있는 경우, 서로 다른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요인은 역사적인 요소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이나 사람들의 이동, 침공 등도 언어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를 들어, 유럽의 대부분의 언어는 알파벳이 기본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유럽의 많은 지역을 지배했던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 언어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면서 많은 언어들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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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단오가 뭐하는거죠? 어떤걸 기념하는거죠?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단오(端午)는 1년 중에서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날이라 하여 한국, 일본, 중국에서 음력 5월 5일에 지내는 명절이다. 한국에서는 3대 명절중 하나로 분류하기도 하며 다른 말로 '술의 날' 또는 순우리말로 '수릿날' 이라고도 한다. 시기적으로 더운 여름을 맞기 전의 초하(初夏)의 계절이며, 모내기를 끝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기풍제이기도 하다.이날이 되면 기본적으로 남자들은 씨름을 하고 여자들은 그네뛰기를 했는데, 예전에는 그네를 한자로 천추, 단오를 천추절이라고도 했다. 또한 수릿떡을 먹기도 했고, 조상의 묘에 성묘를 가고,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으며, 화채를 만들어 먹고 장명루 팔찌를 만들었다.예전에는 설날, 한식, 추석과 더불어 한국의 4대 명절로 분류되기도 한 주요 명절이었으나 현재는 공휴일에서 제외되어 명절로서의 의미는 많이 퇴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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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단군신화가 역사로 인정받고 있나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단군조선은 국가의 시조로서 중요시되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지배자인 단군과 기자는 국조(國祖)로서 제사를 지냈으며 단군조선은 조선의 역사가 중국에 못지 않게 오래되었다는 자부심으로 강조되었다.그러나 문자 기록이 미비했던 시기의 고대 국가였던 탓에 단군조선과 관련된 기록은 매우 소략하고 정확한 연대도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나마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한 사대주의로 인해 중국 은·주에서 도래한 기자가 시조로 선호되면서 사대부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편찬된 많은 역사서들은 대부분 단군조선부터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기자조선 또는 삼국을 기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단군조선은 기자조선의 기록에 부기(附記)되거나 별도의 기록으로 다루어졌다.일제강점기에 단군조선은 고조선과 함께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역사적 실체를 부정당하였다. 일제는 단군조선과 단군신화가 신화에 불과하고 역사성이 없어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식민사관의 일환인 ‘타율성론’에 입각하여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식민지배가 계속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단군신화 및 단군조선에 대한 문헌적 연구가 병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 박은식, 신채호 등은 민족사학을 주창하며 단군조선을 민족의 시초가 되는 국가로 강조하였다. 또한 한민족뿐만 아니라 만주, 몽골 등을 모두 단군조선의 후계 국가 또는 민족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단군신화 및 단군조선으로부터 고조선의 역사와 사회상을 분석하고 있다. 기자조선과 함께 단군조선이라는 왕조는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2개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 있어서도 다양한 견해가 나타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단군조선 시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23세기에서 기원전 11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형성되지 못하였던 때로 본다. 한편 단군에 대해서는 랴오닝성 및 한반도 서북부에 걸쳐 분포하던 여러 촌락 또는 부족 국가의 정치·종교적 지배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200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에서도 최근 2~3년 사이 정선, 춘천 등에서 청동기 초기 유물로 보이는 덧띠새김무늬 토기가 기원전 2000년쯤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빗살무늬 토기와 함께 발굴되어 청동기 문화를 가졌다는 고조선 건국시기와 청동기 도입 시기가 거의 일치하여 청동기 시대도 연대를 올려야 한다는 학계의 지적에 따라, 2007년 2월 23일에 대한민국 교육인적자원부는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부분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좀더 명시적인 표현으로 수정할 것을 담은 서술 지침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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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 문화재 중 앞으로 세계문화유산이 될 만한 문화재는 무엇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모든 세계문화유산은 등재되기 전에 잠정목록 이라는 단계를 거쳐 등재됩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심사는 잠정목록에 오른 유산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등재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잠정목록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잠정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강진 도요지(1994년 9월)설악산 천연 보호구역(1994년 9월)남해안 일대 공룡 화석지(2002년 1월)대곡천 암각화군(2010년 1월)중부내륙 산성군(2010년 1월)염전(2010년 1월)우포늪(2011년 1월)외암마을(2011년 3월)낙안읍성(2011년 3월)한양도성(2012년 11월)화순 운주사 석불석탑군(2017년 1월)가야고분군(2019년 1월) 2023년 5월 11일 등재 권고가 내려져 등재가 확실시 되고 있다.양주 회암사지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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