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스키타이 민족은 어떤 민족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스키타이 민족은 오늘날 러시아 남부, 캅카스 동부, 우크라이나와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역에 거주했던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유목민족이다.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들 스스로는 스콜로트라고 불렀으며 스키타이는 그리스인들이 부른 말로 고대 그리스어로 '궁수'(Skuthēs)에서 유래했다. 페르시아에선 샤카(Sakā)라고 불렀는데 뜻은 동일했다. 스키타이와 국경을 마주하던 아시리아에선 '유목민'이란 의미의 아스쿠자이(Askuzai)라고 불렀다.본디 이들은 그저 이란계 유목민족이었지만 기원전 11세기쯤 유입된 다른 이민족들과 섞이며 '스키타이'라는 정체성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알려진 바로는 최초의 기마 민족으로 채리엇이 아닌 직접 말을 타고 이동하며 싸웠다고 한다.이들이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한 기원전 9세기 즈음에 킴메르족이라 불리는 다른 유목민족이 있었는데, 스키타이인들과 경쟁을 반복하던 중 스키타이의 기술이 좋아지고 수가 많아지자 기원전 7~6세기에 걸쳐 킴메르인들을 캅카스 지역 너머로 몰아내고, 텅빈 캅카스, 카르파티아 산맥도 넘으며 동서남북으로 크게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그 이후로 세력이 점점 줄어들더니 기원전 4세기에는 서방에서 몰려온 이민족들에게 서방 영토 일부를 빼앗기고, 기원전 4세기에는 켈트족과 게르만족, 게타이족의 압박으로 서방의 영토를 영구히 상실했다.스키타이는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넓혔는데 당시 동쪽에 있던 스키타이 또는 샤카들의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할 때, 동쪽에서 흉노와 오손, 월지가 공격하여 남쪽인 그리스-박트리아와 파르티아로 옮겨가 두 국가를 침략했다. 한편 파르티아는 스키타이인들을 방어했으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멸망했다. 또한 스키타이들은 인도 북부에 있던 인도-그리스 왕국도 쳐들어가 인도-스키타이 왕국이 되었으나 세력이 약해져 파르티아의 세력 일부분에 멸망해 그 자리는 인도-파르티아 왕국으로 대체되었고, 그들이 페르시아화되었는지 멸망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사라지게 되었다.서쪽에 있었던 스키타이인들은 크림 반도와 그 근역에서 살아가다가 기원전 2세기에 세력이 약해지면서 사르마티아인과 알란인에게 흡수되었다. 그 후손이 오세트인이다.
Q. 크레타문명의 현대 지명의 이름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현재의 크레타 섬은 그리스 남부 에게 해와 지중해에 걸쳐 있는 섬으로, 그리스에서는 가장 크고 지중해에서는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크레타섬 남쪽 근해에 있는 가브도스섬은 유럽의 최남단이기도 하다. 크레타주는 이 섬과 부속도서로 이루어진 주로, '에게 분권 정부'에 속한다. 이라클리온, 라시티, 레팀노, 하니아 등 총 4개의 지역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Q. 글로벌리스트 딥스테이트 세력은 그냥 음모론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질문하신 사항은 음모론의 영역이기 때문에 존재의 근거가 있다 없다를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래의 용어정리로 답을 대신 할까 합니다.•글로벌리스트- 전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권력자들을 말합니다.•딥스테이트- 글로벌리스트와 그림자 정부의 명령에 따르고 같이 일하는 정치인들, 기업인들, 연예인들, 학교교수와 선생들, 의사와 간호원들, CIA, FBI, 적십자사 와 YMCA 같은 모든 단체들 등등을 말합니다.
Q. 임진왜란때 고니시가 기독교 신자라는게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니시 유키나가는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고, 고니시의 휘하 병사들 다수도 가톨릭 신자였다. 고니시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그의 진중에는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했고,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특히 부장이자 사위인 소 요시토시에게도 가톨릭을 믿으라고 권해서 세례성사를 받게 했고, 요시토시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 고니시 만쇼는 훗날 예수회에 입회해 사제가 되었다가 순교한다. 그는 기독교가 허용되는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 최후의 일본인 정식 사제였다. 그의 사촌 역시 세례를 받아 안토니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고니시의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후에 시마바라의 난의 진원지가 된다.
Q. 명나라 탕화는 어떻게 주원장의 숙청을 피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탕화는 대체로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서달, 상우춘 등에 비해 지나치게 박하게 대우받은 측면이 있다. 이는 탕화가 상주에 주둔하며 장사성을 방어할 때, 술에 취해 자기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지 떠들다가 들뜬 나머지 경솔하게도 장사성에게 붙을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탕화는 개국공신 논공행상에서 공작이 되지 못하고 후작 가운데 첫 번째가 되는데 그쳤다.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는 오히려 복이 되었다. 탕화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근신했고, 결과적으로 홍무 연간에 있었던 숙청을 모두 피해 부귀영화를 누리며 죽을 수 있었다.
Q.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실존 인물이었나요?
늑대 젖을 먹고 자란 형제가 로마를 세웠다는 로마 건국신화의 근거가 되는 유적이 발견됐다.이탈리아 로마의 사피엔자 대학 조사팀은 14일 로마 시내의 고대 유적지인 ‘포로 로마노(Foro Romano)’에서 로마 건국 초기 왕궁으로 보이는 유적을 발견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유적은 면적 345㎡(104평)인 건물 잔해와 105㎡(32평)짜리 정원이다.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벽, 출입문, 정교한 가구와 도자기, 잔디 흔적 등이 발견됐다. 진흙의 연대(年代)를 검사한 결과 왕궁은 기원전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타났다.로마 건국신화에 따르면, 트로이 함락 이후 트로이 장군 아에네아스는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가 도시국가를 세웠다. 오랜 세월 뒤 이 나라를 다스리다 동생에게 쫓겨난 왕의 딸인 레아 실비아는 전쟁의 신 마르스와의 사이에서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를 낳았다. 형제는 강물에 버려졌다가 암늑대가 발견해 젖을 먹여 키웠다. 이들이 성장한 뒤, 형인 로물루스가 도시를 세우고 로마를 건국했다는 것.이 신화는 로물루스의 로마 건국 시점을 기원전 753년으로 전한다. 이는 조사팀이 밝혀낸 왕궁의 건축 시기인 기원전 8세기와 일치한다. 따라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실존 인물이었는지와는 별개로, 신화상의 건국 시기에 실제로 로마가 왕정 체제를 갖췄고 건국신화는 이런 배경에서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조사팀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