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홈답변 활동잉크

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한정현 전문가
부산예술고등학교
음악
음악 이미지
Q.  엘리제를 위하여는 엘리제를 위해 만들어진 곡인가요?
엘리제를 위하여는 1810년 작곡되었으나 40년간 사장되어 있다가 1867년 독일의 음악학자 루드비히 놀(Ludwig Nohl)이 베토벤의 자필 악보를 공개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 작품이다.하지만 작곡 당시의 기록이나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엘리제’라는 인물이 실제 존재했었는지, 아니면 가상의 인물인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이 곡이 베토벤이 열렬히 사랑했던 연인 테레제 말파티(Therese Malfatti)와 이별 한 후 쓴 곡이며, 테레제에게 마지막 선물로 준 곡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뒷받침하듯 자필 악보에는 “테레제와의 추억을 위해, 1810년 4월 27일, 베토벤”이라고 적혀 있다.곡명이 ‘테레제를 위하여’가 아니라 ‘엘리제를 위하여’가 된 것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이에 대해 20세기 독일의 음악학자 막스 융거(Max Unger)는 워낙 악필이었던 베토벤의 글씨를 잘못 읽은 루드비히의 단순 실수로 빚어진 일이라고 추정했으나, 자필 악보도 공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실되어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조선시대 사람들은 몇살정도가 평균수명이었나요?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수명은 약 46세이며,일반 백성은 35세, 유년기에 사망하는 경우를 제외한 평균 수명은 평민 이하 약 45세, 양반 약 55세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왕들의 수명이 짧았던 이유는 영양가 높은 음식들을 먹었지만 운동을 하지 않았고, 젊은 나이에 나랏일을 돌보느라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탓인데요.특히 세종대왕은 고기가 없으면 밥을 안 먹을 정도로 고기를 좋아했지만 운동하는 것을 싫어하여 심각한 비만이었다고 합니다.그러나 백성들에 비하면 왕은 무척 오래 산 편인데요.백성들은 영양이 부실하고 햇빛에 장시간 노출된 채일을 했던 탓에 노화가 심각했다고 합니다.실제로 키도 작았다고 합니다.여자는 평균 149cm, 남자는 161cm였으며,20대부터 치아가 빠지기 시작해 40대가 되면 치아가 다 빠졌다고 합니다.그때 당시 30대는 지금의 할머니와 같은 생김새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판자촌에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그들의 심정이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서울 판자촌 사람들의 인터뷰를 모아봤습니다.물론 다 그런건 아니겠으나 우리가 의례히 예상하는 암울함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집안이 기울어지고 과천 어디 2층짜리 주택의 반지하방에 세 들어 살았어. 그때 깨달았지. 사람이 드나드는 문에도 계급이 있다는 걸 알았어. 들어가는 입구부터 달랐어. 집주인은 중간 대문, 2층에 사는 사람은 옆문, 내가 사는 지하방은 보이지도 않는 쪽문을 이용해야 했어. 사람이 드나드는 문에도 이렇게 계급이 있더라구. 창피하더라구. 그러다 여길 이사 왔는데, 나는 이 둥근 천장의 비닐하우스집들과 마을이 너무 좋은 거야. 들어가는 입구도, 집집마다 모양도 특별한 구분도 없고. 동네가 차별화되지 않아서 좋았어.”“암수술 2번 받고 죽을 거 같더라구요. 어디로 가고 싶은데 애들은 어리고 어디를 못 가잖아요. 여기를 와보니까 너무 좋아요. 여기 전부 다 산이고… 여기가 불이 난 적이 있어서 동네가 불나고 나서 쓰레기장이었어요. 그거를 내가 매일매일 봉투사다가 치우고, 여기 암 환자들이 많으니까 링겔병들이 많아요. 그거를 다 치웠어요. 제가… 살면서 조금씩 치우고 가꾸면서 내 마음도 같이 치료가 된 거죠.”“꽃 사다 심고, 뭐든지 갖다 심어야 될 것 같더라고요. 산에게 괜히 미안하더라고요. 아는 분에게 부탁해서 소나무도 잔뜩 심고, 뭐든지 갖다 심고… 산에 너무 미안한 거에요. 녹색을 바라보면 마음이 치유가 되고, 그래서 여기까지 내 목숨이 온 것 같아서 너무너무 감사해요. 진짜요. 풀 한포기라도 전 잘 안 뽑아요. 눈 뜨면 일어나서 정원들과 대화하고, 정말로 그러고 살아요. 사람들이 나보고 감동을 많이 먹죠. 처음엔 왜 이러고 사는가. 내가 사는 이유가 여기 있으니까. 여기 놀러오면 꽃 몇 개씩 따다가고, 가지 몇 개씩 따다가고 그렇게 나누고 하려고 심는 거지 우리가 먹으면 얼마나 먹겠어요. 여기 집을 짓고 사는 게 산에게 미안해서 이 산을 다시 되돌려 주고 싶고, 그래서 많이 갖다 심고 그래요. 저는 매일 아침 눈뜨면 한 바퀴 돌면서 얘네들과 대화해요. 대화하고 새소리 듣고. 계절마다 새소리가 다 달라요. 이렇게 새소리를 들으면 계절을 다 느껴요. 이게 그 누구도 느낄 수 없는 여기에서 사는 기쁨이에요.”
역사
역사 이미지
Q.  르네상스 시대에 대하여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서유럽에서 일어난 문화계의 큰 변화이며 각 세기별에 따라 이탈리아어로 트레첸토(trecento, 300), 콰트로첸토(quattrocento, 400), 친퀘첸토(cinquecento, 500)라 부른다.르네상스의 기본적인 성격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복원을 추구한다. 흔히 문예 부흥으로 번역된다. 용어 르네상스의 의미는 '재생', '부활'이며 그 어원은 조르조 바사리의 책 "예술가 열전(1550)"에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을 해석하면서 그리스와 로마의 재림이라 하여 이탈리아어로 리나시타(rinascita, 부활)이라한 것이다.이것을 프랑스의 역사가였던 쥘 미슐레(1798~1874)가 '르네상스(Renaissance, 재탄생)'(re, 다시 + naissance, 탄생)으로 번역하고, 스위스의 역사가였던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확실하게 정의 내린 것이다(1860). 부르크하르트는 인문주의자들이 신이 모든 것의 중심인 기독교의 신본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였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시절로 회귀하려 한 운동, 즉 인문주의(humanism)이라고 해석했다. 다만 르네상스식 인문주의가 '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인간'을 의미한다는 해석에는 오늘날 많은 반론이 쌓여있다.현대에는 전성기(특히 중흥기)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역사가들이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암흑시대에 있던 서유럽의 문화가 카롤루스 대제의 통치기에 재부흥한 것을 카롤루스 르네상스라 칭한 것이 대표 예시이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한국 단오제랑 중국 단오제랑 어떤차이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국의 단오는 옥저나 고구려 등 고대 한국사 국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 명절에 중국 명절 이름만 빌려 붙인 케이스라 중국의 단오와는 전혀 다른 명절입니다.
미술
미술 이미지
Q.  안평대군은 의도적으로 안견을 쫓아냈다고 하던데, 이게 무슨 얘기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안견은 안평대군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언제부턴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는데도 안평대군은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안평대군이 아끼는 귀한 먹이 없어져서 안평대군이 저택의 사람들을 추궁할 때 안견의 품에서 먹이 나왔다. 노한 안평대군은 안견을 쫓아냈는데 얼마 못가 계유정난이 일어나서 안평대군이 죽자 사람들은 안견이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중국 천안문 사태 당시 사망자는 얼마나 되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300여 명, 부상자 7천여 명이 발생한 사건이다. 국제적십자협회는 2,600 여명으로 사망자를 발표했다. 비공식 집계로는 1만여 명 사망, 그 후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가 1990년 7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정식 발표한 것을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었으며, 군인과 전경은 56명이 사망, 7,528명이 부상당했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청 후기 태평천국 운동이 급격히 확장된 이유는 무엇이죠?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52년 6월, 남녀 5000~6000명의 병력으로 호남 남부에 들어온 태평군은 거기에서 천지회원이나 광부, 빈농, 유민 등으로 이루어진 다수의 새로운 참가자를 더해서 크게 발전하는 계기를 잡았다. 멸만흥한(滅滿興漢)의 구호나 조세면제의 약속, 부호로부터 빼앗은 재화의 분배, 민중에 대한 엄격한 군규, 죽음을 승천(昇天)으로서 두려워하지 않는 투지, 제왕의 굳은 단결 등에 의해서, 태평군은 민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서 호남, 호북, 강서, 안정을 거쳐서, 1853년 남경을 접령한 당시에는 수십만의 잘 통제된 대병력으로 발전하였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영락제가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긴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한 이유는 남경을 떠남으로서, 가뜩이나 황제에게 대립각 세우는 화남 지주층의 영향력을 축소하여 황권을 강화하고, 북경에 자리잡음으로서, 만리장성 이북까지 영향력을 투사하고 나아가, 금군과 북방군을 황제가 통제하여 혹시 모를 군벌 반란 가능성을 확실히 줄이기 위함 이었습니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태조의 기인 제도는 지방 세력을 누르기 위함이였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는 송악 호족인 태조 왕건이 다른 지방 호족들의 지지를 업고 궁예를 몰아내며 만든 나라였기 때문에 호족들의 힘이 셌고, 이 때문에 왕건은 정략 결혼을 통해 다른 호족 집안들이랑 전부 사돈을 맺어가며 어떻게든 이들을 통제하려 들었습니다.일단 인질로 잡아두긴 했지만 고려의 호족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기인 제도로 온 호족 자제들에게 후한 대접을 했고, 호족 입장에서도 중앙에 줄을 댈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윈윈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날수록 지방에 대한 조정의 영향력이 계속 강화되고 호족의 힘은 빠지면서 이에 비례해 기인의 대우도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고, 몽골의 침입으로 나라가 어려울 무렵에는 일부 힘있는 호족의 자제를 제외한 나머지 기인들은 일꾼 취급을 받으며 사역에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141142143144145
아하앤컴퍼니㈜
사업자 등록번호 : 144-81-25784사업자 정보확인대표자명 : 서한울
통신판매업신고 : 2019-서울강남-02231호개인정보보호책임 : 이희승
이메일 무단 수집 거부서비스 이용약관유료 서비스 이용약관채널톡 문의개인정보처리방침
© 2025 Ah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