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홈답변 활동잉크

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한정현 전문가
부산예술고등학교
미술
미술 이미지
Q.  여자프로골프 선수는 어디에서 티샷을 할까요?
골프티박스는 티마커의 색깔에 따라 크게 4가지 종류(화이트 티, 옐로 티, 레드 티, 블루 티) 로 나뉜다. 골프티박스를 티마커에 따라 나눈 이유는 단순하다. 각자의 골프 실력 또는 보낼 수 있는 비거리에 따라 티샷을 하는 티잉 구역을 달리 해야하기 때문에 그렇다. 남성과 여성이 같은 티잉 구역에서 티샷을 친다면, 당연히 비거리가 짧은 여성이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타수를 기록하게 된다. 따라서 티마커의 위치를 조정함으로서 이 둘의 형평성을 맞추는 것이다. 티마커부터 홀컵까지의 거리가 가장 짧은 티마커부터 나열해보면 레드티 -> 옐로 티 -> 화이트 티 -> 블루 티 순이다.다시 말해, 레드 티가 가장 짧고 블루티가 가장 멀다. 간혹 블루티 대신에 블랙티가 있는 경우도, 또는 블루티 다음으로 블랙티가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는 골프장마다 다르기 때문에 굳이 블랙티를 명시해 놓진 않았다.레드, 옐로, 블루티는 모두 공통된 티마커니 이것만 알고 있으면 충분하다.레드 티는 다른 말로 레이디 티 라고도 불린다. 보통의 아마추어 여성이라면 레드티에서 치면 된다.옐로 티는 프론트티, 실버 티, 시니어 티 라고도 불린다. 남성 시니어나 중상급 여성 골퍼라면 옐로 티에서 치면 된다.화이트 티는 레귤러 티 라고도 불린다. 평균적인 아마추어 남성 골퍼라면 화이트티에서 치면 된다.마지막으로 블루 티는 골드 티 라고도 불린다.세미프로나, 시니어프로, 또는 일반인 싱글골퍼 라면 여기서 치게 된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고부 민란이 일어난 배경은 어떻게 되나요
고부민란은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된 농민봉기이다.1894년(고종 31) 1월 고부 지역의 동학접주(東學接主) 전봉준(全琫準)이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항의하고자 이 지역 농민들을 규합하여 일으켰다.조병갑은 고부군수로 부임한 이래 ① 농민에게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여 면세(免稅)를 약속하고서도 추수시에 강제로 세금을 받고, ② 군민들에게 불효·불목(不睦)·음행(淫行)·잡기(雜技) 등의 죄명을 날조하여 2만냥 이상을 강탈하고, ③ 태인군수(泰仁郡守)를 지낸 적이 있는 그의 부친의 송덕비각(頌德碑閣)을 짓는다고 1,000냥 이상을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징수하였으며, ④ 대동미(大同米)를 농가에서 거둘 때는 좋은 쌀 16말[斗]을 표준하고, 상납할 때는 나쁜 쌀을 사서 바치게 하여 그 차액을 착복하였다. ⑤ 만석보(萬石洑)가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데도 임금 한푼 주지 않고 농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신보(新洑)를 쌓게 하고 가을에 가서 1두락에 1~2말의 수세(水稅)를 받아 700석이나 착복하였다.처음 전봉준 등은 두 차례 40∼60명이 조병갑에게 가서 만석보 수세에 대한 감면을 진정하였으나, 조병갑은 이를 일축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1894년 1월 10일 약 1,000의 동학도와 농민을 이끌고 고부 군아(郡衙)를 습격하였다. 농민군은 먼저 무기고를 부수어 총을 빼앗고, 옥을 열어 억울한 죄수들을 석방하였으며, 불법으로 약탈한 수세미를 농민에게 반환하고 만석보의 신보를 파괴하였다. 이 틈에 조병갑은 전라감영으로 달아났다가 정부에 의해 체포되고, 박원명(朴源明)이 새로 고부군수로 부임하여 사태를 잘 수습하고 농민들도 흩어져 귀가하였다.그러나 안핵사(按覈史)로 임명된 이용태(李容泰)는 민란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죄없는 농민들을 함부로 체포하고 부녀자들을 능욕하며 재산을 약탈하는 등 패악을 자행, 농민들을 극도로 자극하게 되었다. 이에 전봉준은 3월 21일 백산(白山)에서 동학군 8,000으로 전면전을 일으켰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과거 발칸반도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왜 지금처럼 여러국가로 나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대타협'을 통하여 형성된 제국(1867~1918). 독일인을 주로 하여 슬라브 인, 마자르 인 등을 포함한 복합 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완패한 다음 국가 조직을 재편하여 구성하였다. 헝가리 왕국은 독립국으로 독자적인 헌법, 의회를 갖고 있었으나, 국왕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겸임하였고, 외교, 군사에서는 양국 일체였다. 그러나 체코 인을 주로 하는 슬라브 계는 범(汎) 슬라브 주의로 기울고 궁정의 범 게르만 주의와 대립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1918년의 산제르만 조약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로 나누어 독립하면서 소멸되었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애국계몽운동은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애국계몽운동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 상실의 위기감이 고조되던 시기 갑신정변, 갑오개혁, 독립협회운동으로 이어지는 개화 자강 계열의 운동을 계승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입니다. 지식인들은 교육, 계몽, 언론 활동 등을 통해 우리나라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정치사회단체, 학회, 학교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펼쳤습니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차전놀이는 언제부터 시작한 민속놀이이고, 어떤 규칙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차전놀이는 여러사람이 함께 참여하는 민속놀이의 하나로 '동채'라는 기구를 만들어 양 편으로 갈라져 밀어붙여 승패를 겨루는 경기이다. 차전놀이의 기원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나 후삼국 말기 고려왕조의 태조 왕건과 견훤이 싸운 고사에서 유래한다고 전한다. '동채싸움'이라고도 불리는 이 놀이는 경북 안동지방에서 가장 잘 전승되고 있으며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국의 여려 지방에서 매년 열리는 향토 문화행사에 등장하고 있다.동채는 약 10미터쯤 되는 통나무 두 개를 사다리 모양으로 교차시킨 다음, 그 윗부분을 새끼줄로 단단하게 묶고, 사다리꼴의 안쪽에는 폭이 1미터쯤 되도록 판자를 얹어 고정시켜 만든 것이다.이렇게 하여 동채가 완성되면 마을을 대표하는 대장이 그 위에 올라타서 지휘를 하게 되는데, 동채는 처음에는 수평으로 있다가 싸움이 시작되면 양쪽 머리 부분이 맞물려 수직 방향으로 일어서게 되므로, 몸통 부분에 부착시킨 줄을 왼손으로 단단하게 쥔 채 오른손을 내저어 지휘를 한다. 차전놀이는 동채만으로도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고, 동채를 메지 않은 장정들도 앞쪽에 진을 치고 있다가 상대편에게 격렬한 몸싸움을 벌여서 동채가 앞으로 잘 진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어느 한편의 동채가 상대편의 동채를 내리 눌러 땅에 닿도록 하면 승리를 거두게 되며, 이때 승리한 쪽에서는 자기가 신고 있던 짚신을 하늘로 던져 올려서 기쁨을 표시하기도 한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고려시대 때 화폐가 있었을 텐데, 굳이 상평통보 화폐를 다시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 이유는 고려라는 나라와 조선이라는 나라는 엄연히 다른 나라이기 때문이죠. 예를들어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때 쓰던 화폐를 그대로 쓸 수 없는 것과 같이 이치입니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우리나라나 동아시아에서는 비행기 발명이나 하늘을 날고자 실험을 한 위인이 없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동양의 가장 오래된 고전 중 하나인『산해경(山海經)』에서 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수레, 비거(飛車)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산해경』은 중국 고대의 지리서로 기원 전 2세기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책이다. 재미있는 사실은『산해경』에 하늘을 나는 수레인 비거가 그림까지 곁들여 소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그림에 대해 약간 언급해보면 다음과 같다. 수레 위에는 네모난 통이 있고, 그 안에 옷을 벗고 있는 도인이 깃발을 치켜들고 앉아있다. 깃발이 휘날리는 것으로 보아 제법 바람이 센 듯하고, 도인의 얼굴은 마치 사자가면을 쓴 것처럼 험상궂어 보인다. 두 개의 바퀴 모양은 마치 바람개비처럼 생겼고, 수레 양옆으로 난 날개는 새의 날개를 닮았다. 아득한 고대의 상상치고는 상당히 구체적인 이 그림을 보면 ‘비행’에 대한 인류의 염원이 얼마나 간절했는가가 십분 짐작이 간다. 우리나라에도 임진왜란(1592년) 당시 진주성전투에 하늘을 나는 수레, 비거가 등장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신경준(申景濬)[1712~1781]의 『여암전서(旅菴全書)』의 「책차제(策車制)」란 글을 보면, 임진왜란 때 김제 사람인 정평구(鄭平九)가 비행기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의 내용을 보면, ‘임진 연간에 영남의 읍성이 왜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성의 우두머리에게 비거의 법을 가르쳐, 이것으로 30리 밖으로 날아가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영남의 진주성이 왜군에게 포위되자, 정평구는 평소의 재간을 이용하여 만든 비거를 타고 포위당한 성 안에 날아 들어가, 30리 성 밖까지 친지를 태우고 피난시켰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측 기록인『왜사기(倭史記)』에는 전라도 김제에 사는 정평구가 비거를 발명하여 1592년 10월 진주성전투에서 이를 사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규경(李圭景)[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비거변증설(飛車辨證說)」에는 ‘임진왜란 당시 영남의 어느 성이 왜군에게 포위당했을 때 그 성주(城主)와 평소 친분이 두텁던 어떤 사람이 나는 수레, 비거를 만들어서 성중(城中)으로 날아 들어가 성주를 태워 30리 밖에 이름으로써 인명을 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이규경 자신이 기록한 것으로 ‘강원도 원주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비거에 관한 책을 소장하고 있거니와 이 비거는 4명을 태울 수 있으며, 모양은 따오기(혹은 고니)와 같은 형으로서 배를 두드리면 바람이 일어서 공중에 떠올라 능히 백장(百丈)을 날 수 있되 양각풍(羊角風)이 불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광풍이 불면 추락한다 하더라.’라는 구절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규경은 전주부인(全州府人) 김시양(金時讓)에게 들은 말도 곁들여 기록해 놓고 있다. 기록내용을 보면, ‘호서(湖西)[충청도] 노성(魯城) 지방에 사는 윤달규(尹達圭)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명재(明齋)의 후손이다. 이 사람이 정밀하고 교묘한 기구를 만드는 재간이 있어 비거를 창안하여 기록하여 두었다. 이러한 비거는 날개를 떨치고 먼지를 매면서 하늘로 올라가 뜰 안에서 산보하듯이 상하 사방을 여기저기 마음대로 거침없이 날아다니니 상쾌한 감은 비길 바 없다. 비거는 우선 수리개와 같이 만들고 거기에 날개를 붙이고 그 안에 틀을 설치하여 사람을 앉게 하였다. 물에서 목욕하는 사람이 헤엄치는 것처럼 또한 자벌레나비처럼 굽혔다 폈다 하는 것처럼 하여 바람을 내면서 날개가 저절로 떠올라가니 잠깐 동안에 천리를 날아다니는 기세를 발휘하여 십여 일의 시간을 단축하게 된다. 이것은 큰 붕새가 단숨에 삼천리를 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기록되어 있다.비거는 일종의 사람을 실어 나르는 비행기였다. 비거의 형태와 구조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비거의 비행 원리는 먼저 동체에 있는 가죽주머니의 아래쪽에 뚫려있는 구멍을 열어 압축 공기를 아래로 분출시키면 반작용과 함께 공기 방석작용으로 이륙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비거에 탄 4명이 날개를 움직이는 줄과 연결된 기계장치를 움직여 양쪽 날개를 상하로 움직임으로써 비거는 지면으로부터 떠오르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비거는 공중에서 약 100장(200m) 정도까지 비행할 수 있었으며, 상승기류라도 타면 기록에 있는 것처럼 30리라도 날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625 전쟁의 기간은 얼마나 되었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개시되어1953년 7월 27일에 휴전이 성립되기까지,총 만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된 전쟁이었습니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조선시대에 왕을 가르치는 역활을 했던 사람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빈객(賓客)은 조선시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소속된 정2품 관직이다. 세자시강원은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여 서연(書筵)을 전담하였다. 빈객은 시강관의 임무를 맡아 세자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주로 겸직으로 임명되었으며, 세자의 스승이었다. 시강원의 고위직으로 운영과 관원 임용에 참여할 수 있었다.세자는 세 살이 넘으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며 아주 어린 나이부터 학문뿐 아니라 예절과 법도, 말타기와 활쏘기 등을 배웠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우리나라위인중 홍대영이라는사람이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홍대용은 18세기 북학파(北學派)의 대표적인 인물로 호는 담헌(湛軒)이다. 『의산문답(毉山問答)』을 저술한 사상가이자 혼천의(渾天儀)를 만든 과학자이며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저술한 수학자이기도 하다. 또한 『임하경륜(林下經綸)』을 지은 경세가이자 당대의 뛰어난 거문고 연주가이기도 했으니, 가히 백과전서적 실학자라고 할 만하다.충청남도 천원군 수촌(壽村)에서 태어난 홍대용은 12세에 남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에서 강학하던 김원행(金元行) 선생의 문하로 들어간다. 이곳에서 황윤석(黃胤錫) 등의 실학자들과 사귀며 10여 년 동안 고학(古學)과 상수학(象數學)을 공부하였다. 이후 과거에의 뜻을 접고 실학에 전념한 홍대용은 1765년 숙부 홍억(洪檍)을 따라 평생의 소원이던 중국을 여행한다. 조선후기 북학파의 선구적 인물이기도 한 그는 『의산문답』을 저술하여 동아시아 사상사의 한 획을 그었다.
146147148149150
아하앤컴퍼니㈜
사업자 등록번호 : 144-81-25784사업자 정보확인대표자명 : 서한울
통신판매업신고 : 2019-서울강남-02231호개인정보보호책임 : 이희승
이메일 무단 수집 거부서비스 이용약관유료 서비스 이용약관채널톡 문의개인정보처리방침
© 2025 Ah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