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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한정현 전문가
부산예술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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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송나라가 1년에 요나라와 서하에 지불하던 세폐가 얼마나되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나라의 ‘중국’을 계승한 송(宋)나라와 북방의 거란족이 세운 신흥강국 요(遼)나라는 형세상 한판 대결이 불가피했다. 요나라 섭정인 승천태후와 아들 성종이 직접 20만 대군을 이끌고 송나라를 침공한다. 송나라 진종도 이에 맞서 수도 개봉 근처인 전연이란 곳에서 대치하게 된다. 그러나 정면대결은 피차 출혈이 너무 커 화친을 시도한다. 경제력이 월등한 송나라는 돈을 내놓고, 군사력이 강한 요나라는 창칼을 거두는 조건으로 강화가 성립됐다. 이 ‘전연의 맹약’으로 두 나라는 이후 백년 가까이 태평성대를 누렸다. “돈으로 평화를 샀다”는 비판도 있지만, 송나라가 요나라에 매년 제공한 세폐는 전쟁 비용의 10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는 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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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대시기에 언급하던 사체액설이 정확히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4체액설은 철학자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기원전 약490년~430년)가 처음으로 주장했던 4원소설에 근원을 두고 있다. 4원소설은 우주는 흙, 공기, 물, 불(earth, air, water, fire)의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으로, 현재 일부분만 남아 있는 엠페도클레스의 시 ‘자연의 시(Poem on Nature)’에 해설돼 있다. 한편 4체액설은 그의 제자들이 처음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의 몸은 냉, 건, 습, 열(cold, dry, moist, hot)의 성질을 가진 4가지 체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이 균형 잡힌 상태일 때 건강하다는 학설이다. 4가지 체액은 피, 점액, 황담즙, 흑담즙이다. 피는 열하고 습하며, 점액은 차고 습하다. 황담즙은 열하고 건조하며 흑담즙은 차고 건조하다. 4체액설에 의하면 한 원소가 많을 때 반대가 되는 원소를 보충해주는 것이 좋은 치료법이다. 또 각각의 사람은 어느 한 가지 체액을 중심으로 평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으로 개인의 체질을 구분할 수 있다는 일종의 의학 이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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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함무라비에 법전은 이에는 이라는 게 있는데 당시 시대에서 치아를 중요시했다라고 봐야하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고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가 만든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의 동태복수 원칙을 요약한 문구로, '똑같이 보복한다'라는 의미의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lex talionis) 문장 중 가장 유명한 글귀이며, 인과응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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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대이집트는 치아관리를 중요시여겼는데 당시 어떻게 치아를 관리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 이집트에서는 황소의 발굽, 몰약(수액), 구워서 부순 달걀 껍질, 화산재 등을 조합해 치약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치약을 손으로 직접 문지르는 것이 우리가 알 수 있는 최초의 양치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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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상궁 덕임 왜 정조의 구혼을 두번이나 청혼을 거절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766년(영조 42)에 정조가 승은을 내자 의빈은 울면서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정조는 의빈의 뜻을 납득하고 물러났다.1779년(정조 3)에 첫 번째 간택 후궁 원빈 홍씨가 사망하고 1780년(정조 4)에 화빈 윤씨를 간택하자고 했을 때 정조는 새 후궁을 들이는 것을 꺼리다 받아들였다. 화빈 간택 이후에 정조는 의빈에게 다시 승은을 내렸는데 의빈은 15년 전과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이에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뜻을 굽히며 승은을 받아들였고 상의(尙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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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원효대사가 기이한 행동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효의 파계와 자유분방한 행보는 속세에 돌아와 낮은 민중, 중생들과 함께하는 대중 교화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원효는 파계 이후에도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한 것은 물론 화엄경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의 문구를 따서 '무애'라는 노래를 지었고 여러 촌락에서 이를 노래하고 춤추며 대중 교화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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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지미 카터대통령은 당시 인권을 중요시한 배경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76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은 로널드 레이건과의 경선 끝에 승리한 현직 대통령 제럴드 포드를 후보로 내세웠다. 민주당은 의외의 인물을 내세웠는데 조지아 주 주지사 출신의 정치인 지미 카터였다. 그는 중앙 정계에서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도덕과 인권의 중요성을 내세운 카터는 본인의 똑똑함과 성실함, 그리고 조지아 주 주지사 시절에 보여준 온화한 모습을 무기로 삼아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놀랍게도 카터의 승리였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카터는 키프로스 전쟁과 베트남의 공산화를 거치며 무너져 내린 미국의 리더십을 회복하고 끝이 안 보이는 불황 속에서 탈출할 막중한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대통령이 된 이후 카터는 조지아 주 주지사 시절 조지아 주에서의 흑백 차별을 철폐하고 흑인에게 백인과 동등한 노동의 권리, 교육의 권리 등을 보장했던 카터답게 미국의 안팎으로 인권에 대한 인식을 고양하고 비민주적인 국가에 철퇴를 내리는 데 집중했다. 카터의 인권 외교는 한국의 정치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카터의 집권기에 한국에서는 박정희가 독재를 펼치고 있었다. 1961년부터 이어진 독재와 이로 인한 인권의 탄압이라는 그림자는 정부 주도의 적극적인 개발과 이로 말미암은 고도의 경제성장이라는 빛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했다. 카터 행정부 이전의 미국 행정부들은 박정희의 독재를 묵인했다. 그러나 카터는 박정희의 독재는 물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것까지 비판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카터는 박정희 정권이 인권 문제의 개선에 나서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을 철수할 것이라며 한국을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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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히틀러는 형편없는 무솔리니와 왜 손을 잡은건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히틀러와 무솔리니의 관계는 30년대 초만 하더라도 히틀러가 일방적으로 무솔리니를 선망하는 것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원래 무솔리니를 열렬히 추종했고 무솔리니의 정치 기법을 배우고 본받았다. 따지고 보면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총리 자리를 차지했을 무렵, 나치당(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은 그저 세계 각국에 있는 수많은 파시즘 정당 중 하나에 불과했고 히틀러도 베니토 무솔리니 워너비일 뿐이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초상화를 얻고자 이탈리아에 신청했다가 거절당하기까지 했고, 로마 진군을 흉내내서 벌인 뮌헨 폭동이 실패하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여하튼 베니토 무솔리니는 히틀러가 집권한 직후에도 그를 '시골뜨기 듣보잡(히틀러와 가까워지기 전엔 사석에서 정신나간 미치광이 혹은 위험한 바보로 칭했다고 한다)' 정도로 간주했다. 일례로 1934년,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의해 오스트리아 연방국의 수상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히틀러가 이것을 기회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려고 하자, 무솔리니는 오스트리아 병합을 시도하면 전쟁을 불사할 것이라는 초강경한 경고 전언을 날렸고 히틀러는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의 희망은 4년 후인 1938년에야 안슐루스로 이루어졌는데, 이것도 무솔리니가 침략의 길을 걸으면서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제국(에티오피아 제국의 후신)을 수립하고 독일과 손을 잡은 뒤였다. 스트레사 동맹의 허울을 이용한 팽창주의 결과였던 것이다. 무솔리니에 대한 히틀러의 이런 애정은 훗날 전쟁이 진행되면서 무솔리니의 돌출 행동에 따른 짜증, 애증으로 변하게 되었고, 이런 관계는 그들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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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대 몸속을 알아보려는 내시경같은 시도는 어느시기에 이루어졌을까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에는 말이 주요 교통수단인 탓에 치질에 걸리는 사람이 많았고, 이들의 항문 안쪽을 관찰해 불로 지져 치료하던 것이 내시경의 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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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사우디 아라비아는 왜 아직도 참수형을 유지하고 있는건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우디 사법체계의 핵심 요소인 참수형은 건국 이념인 와하비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와하비즘은 이슬람 경전인 코란과 선지자 무함마드의 언행인 수나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근본주의 성향의 수니 사상인데, 사우디 법관들은 무함마드가 집단 참수를 개인적으로 승인했다는 기록에 근거해 참수형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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