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아람코는 미국 아라비아 석유회사 이름인데 왜 미국지분이나 미국영향력은 왜 없는건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33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석유 채굴 허가를 받은 스탠다드오일 오브 캘리포니아에 의해 자회사의 형태로 처음 설립되었으며 이후 다른 미국의 정유사들이 추가로 사업에 동참했고 엑슨, 모빌, 스탠다드오일 오브 캘리포니아, 텍사코 4개사가 아람코의 지분과 석유 채굴권을 취득하였다.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나오는 값싼 대량의 석유는 이들 미국계 자본의 중요한 수입원이었지만, 자원국유화 사조의 고조와 더불어 원유의 공시가격을 좌지우지하는 세븐 시스터즈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아람코 국유화의 움직임이 점점 강해졌다.1962년 설립된 국영 석유회사 페트로민이 아람코의 주식을 취득하는 방법으로 국유화가 추진되었다. 그후 국유화의 물결이 더욱 높아져 1972년 아람코의 지분을 나눠갖고 있었던 미국의 메이저 정유사들과 OPEC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서 협정을 체결한 결과, 서방 측 진출 석유회사에 대하여 당년 25%, 장래 51%의 산유국 정부의 주식취득(경영참가=국유화) 방침이 결정되어,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아람코의 주식 중 25%를 지배하였다.1973~1974년 대부분의 중동 산유국에서 60~100%의 국유화가 실현되었고 아람코도 1974년 60%의 국유화를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계 4개사의 합계 지분은 40%로 하락하였다. 그리고 1980년에 이르러 사우디 정부는 아람코의 주식 100%를 취득하여 국유화를 완성했다.
Q. 촌담해이의 주요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촌담해이(村談解頤)』는 현재 완전한 형태로 전승되지 않기 때문에 원전의 작품 수에 대해 논란이 있다. 편자가 쓴 서문에서는 수록된 모란의 속임수, 어리석은 하인의 속임수, 미치광이 하인의 중매, 두더지 혼인, 사미승이 홍시를 훔친 이야기, 교활한 토끼의 송사, 홍선이 천모를 맹신한 이야기, 혜능이 연화에게 목을 맨 이야기 등 여덟 편의 작품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 , , 네 편에 대해서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원문이 전해지고 있다. 또 다른 이본인 유인본 『고금소총(古今笑叢)』에는 『촌담해이』 열 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앞서 언급한 것 이외 나머지 여섯 편에 대해서는 후대에 첨부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촌담해이』에 대한 연구는 서지학적 연구 외에 자서(自序)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룬다. 이 자서에서 무위자(無爲子)는 시골 노인들과 나눈 극담(劇談) 가운데 ‘턱이 열릴만한 것[解頤]’을 선택하여 기록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 지극한 이치가 있음을 역설한다. 수록되어 있는 네 편의 작품들은 육담(肉談)이거나 사기담(詐欺談)인데, 줄거리가 정교하며 길이가 비교적 길다. 또한 각 작품 말미에 논평이 있어 작품에 대한 찬자의 감상과 평가를 알 수 있다.
Q. 고려시대 양규 장군은 어떤 분인지?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010년(현종 원년) 제2차 고려-거란 전쟁 당시 양규는 흥화진을 지켰고 거란이 수차례 항복을 권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고 거란은 통주(通州: 현 평안북도 선천군)를 공격하여 총사령관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을 격파하고 다시 양규에게 항복을 권하는 서신을 강조가 쓴 것처럼 꾸며 흥화진에 보냈으나 "나는 왕명을 받고 왔으니 강조의 명령은 받지 않겠다."하며 끝까지 성을 지켰다.양규는 흥화진에서 군사 7백여 명을 이끌고 통주까지 와 군사 1천여 명을 수습했으며, 밤중에 곽주로 잠입하여 잔류한 거란의 병사들을 급습하여 모조리 죽인 후 성 안에 있던 백성 7천여 명을 통주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수도(개경)가 거란에게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란가게 되었다.1011년(현종 2년) 봄 거란군이 철수하게 되자 구주 방면에서 돌아가는 거란군을 지키고 있다가 부하 김숙흥과 함께 거란군을 기습해 20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2,000여명을 구출했으며 석령에 이르러 다시 거란군 2500명을 베고 포로 1000명을 구출하였다.여리참에서는 거란군 1,0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1,000명을 구출했고 다시 거란의 선봉과 애전에서 싸워 1,000여명을 베었다. 그리하여 고군에서 순월 사이에 7차례나 거란군을 기습해 적 65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백성 3만 명을 구출했으며 헤아릴 수 없는 전리품을 노획했다.하지만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져 김숙흥과 함께 거란 성종이 이끄는 주력 부대에 항전하다가 함께 전사했다. 이 전공으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