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우리나라 최초에 서양의학을 습득해서 의사가 되신 분은 어떤 분이신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최초의 의사 박서양은 1885년 백정 박성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봉주리’였다. 아들만큼은 무식쟁이로 키우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 덕에, 박서양은 글을 배웠다. 박성춘은 1893년 에비슨의 치료를 받고 감동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고, 아들을 에비슨에게 맡겼다. 에비슨은 박서양에게 허드렛일을 시키면서 됨됨이를 확인한 후 그를 세브란스의학교 학생으로 받아들였다. 마침내 1908년 박서양은 김필순, 홍석후 등과 함께 최초로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모교에서 화학, 해부학 등을 가르치며 외과 환자를 진료했다. 그러나 의사로서의 안락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간도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나섰다. 2008년 광복절을 맞아 박서양은 ‘건국포장’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Q. 바베큐 음식의 역사와 기원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류 최초의 바비큐는 자연발화에 의해 타 죽은 동식물의 사체를 접하면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불을 발견한 인류인 호모 에렉투스에 의해 발전하였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인류 최초의 화식은 인간을 동물과 구분짓는 인류학적 계기가 되었으며, 인간이 좀 더 인간답게 진화할 수 있는 인문학적 의미를 지닌다.이렇게 인류의 생존과 연관된 바비큐는 공동운명체가 이어져 오게 된 근간이 되었으며 이렇게 인간의 삶과 하나된 바비큐는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정복자들 중 탐험가이자 작가인 Gonzalo Fernández De Oviedo y Valdés 에 의해 카리브해 타이노인디언 음식인 'barbacoa'(바바코아)가 1500년대 유럽에 전해져 알려지기 시작했고 1526년 스페인에서 2판으로 인쇄된 'Diccionario de la Lengua Espanola (2nd Edition)'사전에 등장한 이후 서양 바비큐문화의 원조가 되었으며, 1755년 영국의 사전편찬가, 수필가, 편집자인 ‘Samuel Johnson’은 그의 영어로 된 대표적인 사전인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에 'barbecue'가 등장해 지금의 단어인 'barbecue'라 영어단어 최초의 기록되었다. 고기를 구울 때 사용하는 슬라브 형의 '푸른연기가 나는 사각 나무틀'을 원주민들이 ‘바바코아’로 발음하는 것을 보고 에스파냐어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Q. 조선시대 때 왕은 하루에 몇끼를 먹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왕들은 아침 여섯시에 기상하자 마자 초조반, 열시에 조수라, 열두시에 점심, 오후 세시에 참, 여섯시에 석수라, 그리고 잠들기전 밤 아홉시에 야참 등 열다섯 시간동안 무려 하루에 여섯끼를 먹었다.
Q. 백제의 요서진출설은 논라이 매우 많은데 현재는 어떻게 보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백제의 요서진출설은 사실무근의 낭설은 아니며 '송서(宋書)'와 '양서(梁書)' 등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 계통의 문헌에서 관련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기 북조 측과 한반도의 사서에는 이와 관련된 직접적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다.이 학설의 진위여부는 조선시대의 실학자들부터 시작해서 현대의 역사학자 및 역사 애호가들에게 이르기까지 고대사 부분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는 난제 가운데 하나이며, 오늘날 사학계에서는 한 지역에 대한 영토적 직접 지배라기보다는 군사적, 상업적 거점을 확보한 것으로 보는 주장이 유력하다. 이 때문에 현대의 국정 및 검인정 교과서 등에는 '진출했다', '영향력을 미쳤다' 정도의 한정적 용법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지도상에는 별도의 영토 표기 없이 화살표만으로 나타낸다.
Q. 조선의 무관 관직에는 무엇들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392년(태조 1)에 제정된 문 · 무산계는 다소의 수정을 거쳐 『경국대전』에 법문화되었다. 이에 따르면, 무산계의 최고는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이며, 최하는 종9품의 전력부위(展力副尉)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정1품에서 종2품까지는 문산계와 동일한 관계명이 수여되었다. 또한 무과(武科)를 실시하여 문 · 무 양반체제는 더욱 정비되었다. 무과는 태종 2년 1월에 처음으로 시행되어 1등 3명, 2등 5명, 3등 20명의 28명을 선발하였고, 1등은 종7품직을, 2등은 종8품직을, 3등은 종9품직을 주되, 본래 관직을 갖고 있는 사람은 거기에서 1등급을 더 올려주도록 되어 있었다.관직에 있어 문 · 무반 실직 수는 5,606과(窠)였는데, 그 가운데 무반 실직은 경관직(京官職)이 3,324과, 외관직(外官職)이 502과로 모두 3,826과였다. 조선시대의 무반 관아와 관직으로는 중앙에 중추부(中樞府) ·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 오위(五衛) · 겸사복 · 내금위(內禁衛) · 훈련원(訓練院) ·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등이 있었다. 여기에는 정1품의 영중추부사에서 종9품의 부사용 등이 있으며, 지방에는 도(道) · 진(鎭) 등에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서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이 있었다. 무반 당상관 중에서 극소수는 의정부(議政府) · 6조(六曹) · 한성부(漢城府) · 승정원(承政院) · 도 · 부 · 목 등의 문반직에 제수되기도 하였다.무반에 선발된 자는 1402년( 태종 2) 이후 무과가 실시되면서 대부분이 무과급제자로 충당되었다. 이 밖에 부분적으로 문음 자제가 내시(內侍) · 다방(茶房) · 선차방(宣差房) 등의 성중관(成衆官), 녹사(錄事)를 거치거나 충의(忠義) · 충찬(忠贊) · 충순위(忠順衛) 등의 특수군을 거쳐 북변(北邊) 또는 연해(沿海)의 수령이 되거나, 양반 · 양인으로서 내금위 · 별시위 · 친군위의 선전관(宣傳官) · 갑사(甲士) 등의 군직을 거쳐 무반으로 진출한 경우가 있었다. 이들의 승진은 무과 · 무과중시(武科重試)나 군공(軍功) · 대가(代加) · 도시(都試) 및 근무 성적 등에 따랐다.